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회원들이 지난 1일 문경에 있는 박열 의사 기념관을 찾았다. 1만4455㎡(4373평)의 부지 위에 세워진 백색 기념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다. 박열 의사의 독립운동 활동을 돌아보던 중, 죽산 조봉암 선생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나키스트 조직인 '흑도회'에서 두 독립운동가가 잠시나마 활동을 함께했다는 내용이다.

2년 전인 2017년 6월, <박열>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됐다. 당시에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230만 관객이 찾으면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박열 의사는 독립운동가다. 경북 문경 출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천황 암살사건을 계획한 사실이 밝혀져 22년간 옥고를 치렀다.

아나키스트였던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 여사와의 일화는 더욱 유명하다.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후미코는 지금 박열기념관 옆에 안장되어 있다. 의사는 일본 패망과 함께 석방된 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6·25 발발 이후 북한에 납치돼 김일성 정권에 의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한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인천 강화 출신 독립 운동가인 죽산은 일제 치하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고, 해방되는 순간까지도 교도소에 갇혀 지내야 했다. 해방정국에서도 죽산의 활동은 눈부셨다.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내며 농지개혁을 이뤄냈고 진보정당을 만들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사법살인으로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에게 씌워진 누명은 지난 2011년 재심 판결로 벗을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한 상태다.

내로라하는 명망가들이 죽산의 서훈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어 보인다. 죽산의 석상 건립을 위한 시민 성금도 8억원이나 조성됐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 인천 출신의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에 시민들의 보다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