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의 이상 품고 민중 속으로 가다

 

▲ 이기연作 '노동자의 시대 막은 오른다' /사진제공=경기문화재단

 

▲ '시점·시점_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에 미술동인 두렁 활동 당시 활용됐던 걸개그림과 열림굿을 재현한 모습.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1982년 결성…초기 서울 중심 활동
인천·수원으로 민중미술 영역 확대

탐미주의적 예술관에 반기 들고
노동자들과의 연대에 적극 참여



빼앗긴 그들의 그림이 돌아왔다. 1985년 경찰에 압수돼 자취를 감췄던 미술동인 두렁의 작품이 30년 만에 공개됐다. 살아있는 '산' 예술을 부르짖던 미술동인 두렁에게 드디어 '봄'이 찾아온 것이다. 봄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예술은 온전히 민중의 품에서 민중의 것이 됐다. 격동의 시대 민중미술의 씨알, 미술동인 두렁을 소개한다.


시점·시점_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
▶기간 : 2019년 10월29일~2020년 2월2일
▶장소 : 경기도미술관 2층 기획전시실(안산시 단원구 동산로 268 화랑유원지 내)

미술동인 두렁은
1982년 10월 결성됐다. 결성회원은 김봉준, 장진영, 이기연, 김주형이다. 1983년 7월7일부터 17일까지 서울시 아현동 소재의 애오개 소극장에서 창립예행전을 치루고 '산그림'을 펴냈다. 이듬해 4월,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창립전을 열고 길놀이와 열림굿으로 전시 개막을 알렸다. 1983년 12월 미술동인 두렁 판화 달력을 펴냈고 1985년 2월에는 '을축년미술대동잔치'에 참가했다. 3월에는 내부 조직 재편성을 통해 현장부, 조직부, 사회부, 기획부를 두었고,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에 참여했으나 작가는 경찰에 연행되고 작품은 탈취당했다. 그해 11월 민중미술편집회 이름으로 '민중미술'을 출간했다. 이들은 판화, 민화, 만화, 걸개그림의 시각 미술을 비롯, 탈춤, 풍물패, 연극, 영화 등 예술을 통한 사회변혁을 시도했다. 예술을 위한 예술, 탐미주의적 예술관을 비판하며 민중을 위한 예술을 정착시키기 위해 생활문화로 영역을 넓혀갔다. 당시 미술동인 두렁은 민중미술의 태동 역할을 하는 동시에 지역으로 산파하는 중심 본부에 위치해 있었다. 서울에 기반을 두고 있던 두렁은 인천과 수원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지역에서도 민중문화예술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연대기
▶결성연도 : 1982년 10월
▶결성회원 : 김봉준, 장진영, 이기연, 김주형
▶1983.7.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 '산그림' 출판, 부대행사 문화아수라판 창작탈마당극 연출
▶1983.12. '미술동인 두렁 판화 달력(실천문학사)' 출간
▶1984.4.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 '산미술' 출판 열림굿
▶1985.3. '을축년 미술대동잔치' 참가
▶1985.7.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참여
▶1985년도 밭두렁(인천), 논두렁(수원) 조직
▶1986.5. '깡순이' 작가 이은홍 구속
▶1986.8. 이억배, 수원에서 최춘일과 목판모임 판 결성
▶1986.12. 라원식, 인천풍물패 한광대 창단, 주안 문화공간 쑥골마루 개설
▶1988.4. 장진영, 만화가들과 작화공방 개설
▶1988.5. 성효숙, 인천지역 4공단 노동조합 조직화 참여
▶1989.1, 경인·경수지역 민중미술 공동실천위원회 결성, 부천민중미술인회(김봉준), 안양문화운동연합 우리그림(이억배), 수원미술패 나눔(손문상), 인천 미술패 갯꽃(정정엽), 그림패 활화산, 그림패 엉겅퀴, 민중미술연구소 등

선언문
사회적 이상과 미적 이상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단된 현실을 민중적 토대 위에서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민족적 이상속에서 통합된다.('산그림'을 위한 몇가지 다짐 1)
미술은 노동과 관념, 물질과 의식의 총체로서 일하며 살아가는 전인적 삶의 모습 중 하나이다.('산그림'을 위한 몇가지 다짐 2)
아름다움의 뜻은 늘 새롭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의 고양일 뿐 아니라 힘의 본질인 생명과 위 세요소를 집단속으로 밝게 틔우는 흥을 모두 포괄하는 신명이야 말로 아름다움의 본성이다.('산그림'을 위한 몇가지 다짐 3)
…중략
개방적인 공동작업과 민중과의 협동적 관계는 전문성의 공동활동과 미술행위의 민주화를 위한 기초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민중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산그림'을 지향한다. ('산그림'을 위한 몇가지 다짐 6)


 

[시대 고발자_미술동인 두렁 필명 라원식(양원모) 인터뷰]

 

"삶 가까이 살아 숨 쉬는 미술, 그것이 두렁의 지향점"

 

▲ 1980년대 미술동인 두렁에서 라원식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던 양원모 전 경기도어린이박물관장.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1980년대 미술동인 두렁에서 라원식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던 양원모 전 경기도어린이박물관장.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민중미술 상징 '걸개그림' 용어 고안
인천지역 풍물패 '한광대' 창단 주역



"모두의 미술을 꿈꿨습니다. 노동의 현장에서 때로는 놀이에 현장에서, 우리 삶 가까이에서 살아 숨 쉬는 미술을 하고자 했던 것, 이것이 미술동인 두렁입니다."

누구보다 치열했던 젊은 날의 '라원식'을 뒤로한 채 평범한 시민 '양원모'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양원모 작가의 가슴은 여전히 뛰고 있다. 지난달 26일 광교 아트스페이스에서 만난 양 작가는 기독교 탈춤 공연 준비로 한껏 고무돼 있었다.

"미술동인 두렁의 모토가 되기도 했던 기독교 탈춤반은 교회 통합운동의 일환으로 교파를 초월하고 종교 간의 협력을 이루고자 탈춤, 풍물패, 민중예술 등으로 풀어냈던 활동을 했었죠. 기독교를 배경으로 민중예술운동을 하던 그때로 45년 만에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양 작가는 얼마 전까지 경기문화재단 경기도어린이박물관장을 지내며 도민들의 문화 향유를 위해 일해왔다. 2년의 임기를 끝으로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고 있는 양 작가의 첫 번째 과제는 뜨거웠던 지난날의 기록이었다.

"시점시점 전시회에 소개된 것처럼 민중미술과 소집단들의 활동 자료를 아카이빙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봅니다. 당시의 민중들을 위해 행해졌던 풍물패의 공연, 연극, 영화 등 민중공연 예술에 있어서 아카이빙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셨던 박형규 목사님의 추도 5주기를 맞아 이번 공연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인·경수지역을 중심으로 민중미술의 씨알 역할을 해왔던 '미술동인 두렁'의 주축 멤버였다. 당시엔 '양원모'라는 지금의 본명 대신 '라원식'이라는 필명으로 민중미술의 확대와 보급을 위한 많은 활동들을 해왔다.

미술동인 두렁은 당시 탐미주의적 미술을 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예술을 사회적 효용성이 큰 가치로 여기며 엘리트주의적 사고를 버리고 민중을 위한 미술을 하고자 했던 것이 두렁의 가장 큰 지향점이었다. 이들 소집단은 미술과 예술로 사회의 변혁을 시도했다.

"두렁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미술을 하기 위한 노력들을 해왔죠. 현장미술전을 하거나 미술교실을 열었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이들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해왔습니다. 두렁이 자연스럽게 노동의 현장에 녹아들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였죠."

두렁은 노동 현장으로의 확대를 위해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것을 공단이 밀집된 인천지역과 성남, 안양, 수원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이때 인천지역 두렁 조직인 '밭두렁'과 수원지역 두렁 조직인 '논두렁'이 탄생했다.

영역을 확장한 두렁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운동에 화력을 불어줄 다양한 미술작품들을 제작했다. 판화, 민화, 만화, 걸개그림 등 미술영역의 성장도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이뤄졌다. 특히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민중미술의 상징격으로 여겨지는 '걸개그림'이라는 용어도 양 작가가 처음으로 고안한 것이다.

"걸개그림 이전에는 괘화라는 말이 더 많이 쓰였었죠. 민중의 미술을 하고자 했던 두렁의 취지대로 한자보다 한글로 쉽게 부르기 위해 걸개그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됐습니다."

인천 밭두렁으로 옮겨와 활동을 이어가던 양 작가는 부평·주안지역의 노동자들과 뜻을 모았다. 노동자들의 주권 행사와 인권 보장, 처우 개선을 위한 교육들이 이뤄졌다. 이때 양 작가는 인천의 풍물패인 '한광대'를 창단했다.

"문화야학을 열고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교육들을 해왔고 풍물패 한광대를 조직해 노동자 문화 행사 등에 적극 참여하며 민중공연 문화의 확산을 이끌어 갔습니다."
우리의 삶, 노동의 현장, 민(民)이 있는 곳에서 두렁은 미술의 수용층을 넓히기 위한 사회참여적 예술을 선도했다. 문학, 공연예술, 시각예술을 통해 놀라운 폭발력을 보여주며 생활문화의 정착들을 가져온 것 또한 두렁의 성과였다.

"두렁이 움직이면 경찰 병력이 깔리는 것은 기본이었죠. 그럼에도 두렁 멤버들은 기꺼이 각오가 돼 있었습니다. 5월 광주를 경험했고, 내 동료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변혁을 위해서는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