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4면의 고정 칼럼 `능허대""는 인천시의 지정기념물 8호에서 인용한 이름이다. 옛날 백제의 사신들이 중국으로 향하던 뱃터이다. 삼국이 정립하던 시절 고구려로 육로가 막혀 부득이 뱃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을 신문의 고정란 이름으로 정한 것은 88년 본지를 창간하면서 인천의 지명중에서 고르기로 하고 독자에게 설문했더니 능허대의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듯 옛 발선처이던 능허대는 지금 옥련동의 육지안에 갇혀있다. 시내에서 송도로 향하는 해안도로의 송도전화국 못미처 좌측의 작은 구릉이다. 60년대 까지만 해도 모래사장에서 서북으로 돌출한 작은 반도의 형국으로 바닷물이 철석거리고 뒤편으로 작은 모래사장에 늙은 해송들로 인해 때로 소년단의 잼보리가 열리기도 했었다. 그렇던 것이 해면매립으로 바다는 저만치 물러가고 공원이란 이름으로 가꾸어져 있다.
 이곳 능허대가 먼 항로의 출항지였음을 입증하는 몇가지 지명과 전설도 전해진다. 문학산 주변에 있다는 별리현이나 삼오지고개는 사신들이 가족과 이별을 나누느라 생긴 이름이라 하며 기생바위 역시 이별이 서러운 기녀가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을 남기고 있다. 바람때를 기다리는 동안 정들었던 사신이 막상 떠나게 되자 투신했던 것이다. 옛포구에는 이런 전설들이 있다.
 능허대의 명칭에 대해서는 박광성 교수의 논문 `능허대에 대하여""에서 상세히 설명된다. 송나라 소동파의 적벽부에서 인용했으리라는 설명인데 만경을 건넌다는 능만경(凌萬頃)의 凌과 바람을 타고 하늘을 오른다는 빙허어풍(憑虛御風)의 虛를 따서 “만경창파를 하늘 날아 오르듯” 항해한다는 비유로 능허대라 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허대의 명칭도 백제가 아닌 고려때부터 사용되었으리라고 한다.
 인천시가 능허대지를 역사적 상징성에 맞는 근린공원으로 조성한다고 한다. 150억원을 들여 면적을 넓히고 전시장과 당시의 백제시대 나루터를 재현한다는 것이다. 역사유적지가 많지 않은 인천에 새로운 명소로 등장하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