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인천-갤러리 콘서트] 2. 정대현 전 이천전기 노동자/장현자 전 반도상사 노동자
[메이드 인 인천-갤러리 콘서트] 2. 정대현 전 이천전기 노동자/장현자 전 반도상사 노동자
  • 이상우
  • 승인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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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에 맞서 싸웠던 그들의 꿈 '인간답게 살기'

 

 

인천은 한국 근현대사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이북 피난민들이 정착하고, 1970년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전국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던 인천의 오늘을 만든 노동자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 갤러리 콘서트 두번째 주인공은 정대현(72) 전 이천전기 노동자와 장현자(69) 전 반도상사 노동자다.
2019년 인천 민속문화의 해 특별전으로 마련된 이번 갤러리콘서트는 안정윤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가 진행을 맡아 지난 23일 오후 3시 인천시립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렸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처마 밑에 한 아이/울고 서 있네/그 맑은 두 눈에/빗물 고이면/음 아름다운 그이는/사람이어라...(후략)-아름다운 사람(김민기 작사·곡). 싱어송라이터 황승미는 부당해고에 맞서 복직을 이끌어 낸 이천전기 노동자 정대현 선생에게 이 노래를 헌정했다.

피난 후 이천전기서 일했던 정대현
'학력별 차등임금' 개선하려다 해고
17년 복직투쟁 끝 대법원 승소 판결


10대 나이에 반도상사 입사 장현자
'여성노동자 폭행' 기폭제 노조 결성
지부장 맡아 열악한 환경 개선 앞장

 

▲ 23일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을 주제로 열린 2019년 인천 민속 문화의 해 특별전 갤러리 콘서트에 연사로 나선 정대현 선생이 이천전기 근무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23일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을 주제로 열린 2019년 인천 민속 문화의 해 특별전 갤러리 콘서트에 연사로 나선 정대현 선생이 이천전기 근무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부당한 해고에 맞선 복직투쟁 이야기

정대현 선생은 최근 대장암과 폐암이 발병했지만, 콘서트 내내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이 살아온 삶을 청중들과 나눴다.

폭격을 피해 인천으로 피난 온 가족사, 송월동·만수동·화수동 등으로 8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던 일, 장남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이천전기에 취직한 후 산업재해로 왼쪽 다리를 잃게 된 아픈 기억, 학력별로 임금을 차별하는 회사에 맞서 민주노조를 만들고 싸우다 해고된 사연, 17년 동안의 소송을 통해 마침내 대법원에서 승소했던 복직 투쟁 등 그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와 닮아 있었다.

"피난내려와서 할 수 있는 것이 생선장사, 조개탄 장사였어요. 그걸로 의식주를 해결했어요. 땔감도 없어서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을 수입하던 대성목재에 가서 나무껍질을 벗겨서 땔감으로 썼죠."

밥을 굶다시피 했던 학창시절, 중학교·고등학교 6년동안 수학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수학여행을 못 가는 학생들을 불러 화장실 청소를 시켰다.

이처럼 부당한 차별에 대한 기억은 이천전기에 입사한 후 겪은 차별 임금과 맞서 싸우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천전기는 일본 도시바(당시 도쿄시바우라)가 1938년 인천 동구 화수동에 설립한 회사다.

1956년 정부가 도시바 인천공장을 민영화하면서 이천전기공업㈜로 바뀌었다.

정 선생은 1967년 8월 입사한 후 6개월도 안돼 작업 중 폭발사고로 왼쪽 다리를 잃었다.

투병과 재활을 거쳐 그해 12월 엔진설계부에 복직했으나 학력별로 임금을 차별하는 회사에 맞서 싸우다 1987년 노조위원장에 선출되면서 노동운동에 나선다.

"근무를 하면서 대학교 나온 애랑 고등학교 나온 애랑 임금 격차가 엄청 심한 거야. 대학교 나온 애를 내가 가르쳤거든, 그런데 임금은 나보다 따블이야. 어용노조는 회사편만 들고."

1987년 15일간의 파업으로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1년간 맡았던 노조위원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줬는데, 노조는 다시 회사의 뜻대로 움직이는 어용노조로 되돌아 가버렸다.

정 선생은 다시 회사와 어용노조에 맞서 싸우다 1990년 12월31일 종무식에서 징계해고를 통보받았다.

그는 어린 두 아들과 노모까지 데리고 매일 회사 정문으로 출근 투쟁을 벌였고, 17년간의 해고무효소송 끝에 2007년 11월23일 마침내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정 선생은 "나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하고 치매까지 걸려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다시 태어난다면 그냥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 23일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을 주제로 열린 2019년 인천 민속 문화의 해 특별전 갤러리 콘서트에 연사로 나선 장현자 선생이 반도상사 근무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23일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을 주제로 열린 2019년 인천 민속 문화의 해 특별전 갤러리 콘서트에 연사로 나선 장현자 선생이 반도상사 근무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옳은 일은 해야했던 가발공장 노동자의 삶

단아한 차림으로 콘서트에 나선 장현자 선생은 낭랑한 음성으로 가발을 생산하는 반도상사 노동자들의 삶을 소개했다.

그는 1967년 17살에 고향인 경북 상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2년만인 1969년 작은아버지가 근무하고 있던 반도상사에 입사했다.

대기업이었던 반도상사는 당시 다른 회사에 비해 근로조건이 월등히 좋아 서로 들어 오려고 했던 회사였다.

70년대 수출주력 상품이던 가발이 호황을 누리면서 회사 규모도 커지면서 노동환경이 날로 열악해졌다.

1000여명이던 노동자들이 1500명, 3000명으로 늘었다.

기숙사와 식당 등 생활환경이 부실했고, 한 달이면 열흘정도 24시간 철야작업도 강요당했다.

CCTV로 작업장을 감시하고, 퇴근할 때에는 '검수'(소지품 검사)까지 실시했다.

"관리자에게 밉보인 사람들은 임금도 오르지 않았어요. 관리직 사원과 생산직 노동자는 식당도 따로 사용했고, 화장실을 갈 때도 팻말을 갖고 다녀야 했어요. 매년 건강검진에서 60명 정도가 폐결핵 진단을 받았고, 회사는 그 사람들을 내쫓았어요. 여성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생각했어요."

이런 불만들은 1973년 겨울 퇴근 검수 과정에서 한 여직원이 새치기 했다는 이유로 경비원에게 방망이로 맞아 쓰러지는 사건을 계기로 노동조합 설립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그는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1977년에는 2대 노조 지부장에 선출됐다.

"우여곡절 끝에 1974년 4월15일 최초로 여성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여성이 지부장을 맡게 됐어요. 노조 결성 이후에는 모든 것이 근로기준법에 맞게 개선됐어요. 식당이 통합되고, 기숙사 시설도 좋아졌고, 임금인상이나 퇴직금, 산재보상도 받게 됐어요."

반도상사 노조는 독서모임, 교육강좌, 문화동아리 활동 등이 활발해서 조합원들에게 '반도대학'이라고 불렸다.

"'한마음'이라는 소식지를 만들었고, 합창단, 탈춤반, 부채춤, 연극반 등을 만들어 매년 12월에 조합원 잔치를 열었어요. 조합원들이 이런 활동을 통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전혀 주눅이 들지 않게 됐다고 해요. 그래서 '반도대학'이라는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장 선생은 "저도 노동조합을 하지 않았으면 일반 여성들처럼 똑같이 생활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노동조합을 통해서 세상의 변화를 알게 됐고, 먼저 깨친 사람으로서 옳은 일은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상우 기자 jesuslee@incheonilbo.com


 

정대현 선생은

▲ 정대현 선생./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정대현 선생./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평생 강한 의지로 노동운동에 헌신



정대현(사진)은 1948년 황해도 옹진군 흥리면 알랑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곳은 어머니의 고향으로 외할버지는 고깃배 8척을 부릴 정도로 유복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4후퇴 때 가족들과 함께 인천 송월동으로 피난했다.

피난민으로 배고픈 학창시절을 보낸 정대현은 '장남인 내가 기술을 배워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인천공고 기계과를 졸업하고, 1967년 동구 화수동에 소재한 이천전기공업㈜(현재 일진전기)에 입사했다.

이천전기 월급날이면 동구 전체가 떠들썩할 정도로 호황을 누리던 중전(重電) 회사였다.

하지만, 입사한 지 1년도 안된 1968년 1월 모터 부품 제작 작업 중 폭발사고로 왼쪽 다리를 잃었다.

8개월여 간의 투병과 재활 끝에 그 해 12월 엔진설계부서로 복직했다.

가족의 의식주 해결을 위해 노동했던 그를 노동운동가로 이끈 계기는 학력간 차별 임금이었다.

정대현은 1987년 민주노조 건설과 차별 임금 철폐를 요구하는 파업에 참여했고, 파업 기간 중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됐다.

1년 뒤 자리에서 물러나자 노조는 다시 어용노조로 돌아갔고 이에 반발한 그의 싸움도 다시 시작됐다.

1990년 12월31일 종무식에서 업무방해를 이유로 회사로부터 징계해고를 통보받은 정대현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노모와 함께 매일 회사 정문으로 출근 투쟁을 벌였다.

1991년 3월 시작된 해고무효 소송은 17년 만인 2007년 11월 대법원에서 마침내 승소했다.

평생을 강한 의지로 가족을 위해, 그리고 우리 사회의 차별 철폐를 위해 싸워 온 정대현은 요즘 대장암과 폐암이 발병해 다시 병마와 맞서 싸우고 있다.

/이상우 기자 jesuslee@incheonilbo.com

 



장현자 선생은

▲ 장현자 선생./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장현자 선생./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여성운동 지원 등 지금도 활발히 활동
 

장현자(사진)는 1951년 경북 상주군 공성면 우하리에서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당시 아버지는 오키나와에 있는 탄광촌으로 끌려갔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하셨지만, 결국 몇 년만에 돌아가셨다.

1967년 17살 나이에 서울로 올라온 장현자는 나이가 어려 받아주는 곳이 없어 두 살 많은 고향 친구의 이름으로 남영동에 있던 롯데 껌공장에서 2년간 일을 했다.

부평에 살던 작은아버지가 근무하는 반도상사㈜에 입사한 건 1969년 9월이었다.

반도상사는 가발을 만들어 미국, 유럽 등으로 수출하며 호황을 누렸고, 다른 곳보다 근로조건이 월등히 좋아 입사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이같은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당시 20세 전후의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한 달에 열흘씩 24시간 밤샘 작업을 강요당했다.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도 작업반장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고 폭언·폭행도 이어졌다.

퇴근할 때는 회사 물건을 몰래 들고 나가는 건 없는지 검수도 당해야 했다.

1973년 18세 여직원이 검수과정에서 새치기 했다는 이유로 경비원에서 몽둥이로 맞아 쓰러진 사건을 계기로 1974년 4월15일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반도상사 노조는 독서모임, 교육강좌, 문화동아리 활동 등이 활발해서 조합원들에게 '반도대학' 이라고 불렸다.

2대 노조 지부장을 맡은 장현자는 그 후 노조활동을 하면서 수차례 연행됐다.

결혼 이후에는 성남에서 탁아소 보육운동 등 시민운동을 이어갔다.

남편을 따라 내려간 대전에서는 2002년 무소속으로 구의원에 당선됐고, 요즘은 결혼한 두 딸이 사는 세종시에서 후배들의 여성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상우 기자 jesus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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