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규 인천내리교회 목사

 

소년 다윗이 던진 물맷돌 하나에 거인 장수 골리앗은 맥없이 무너졌다. 순식간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웅이 됐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전한 뒤 보무도 당당하게 개선하는 다윗과 이스라엘 군인들을 환영하는 여성들이 문제였다. 소고와 꽹과리를 동원해 춤추고 노래하며 환영했다. "사울은 수천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명을 죽였다네." 골리앗의 기세에 꼼짝도 못한 임금 사울보다 골리앗을 제압한 십대 소년 다윗이 훨씬 더 용맹스럽다는 민요였다. 시기심은 눈으로 온다. 사울 임금이 이 광경을 본 후로 "다윗을 시기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삼상 18:9)."

'시기하다'의 영어 'envy'는 '자세히 보다'는 어원을 가진 라틴어 'invidia'에서 왔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궁정 작곡가 살리에리가 황제의 초청으로 즉흥 연주를 하는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야릇한 눈빛을 보라. 시기는 보는 것에서 온다. 친하게 지내는 이웃집 아들이 명문대에 합격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시기심이 솟구친다. 나보다 먼저 승진한 입사 동기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 밸이 꼬인다. 시기는 갖지 못한 자가 가진 자에게 느끼는 악감정이다. 독일어 'Schadenfruede'는 'Schaden'(상해)과 'Freude'(기쁨)가 합해진 말이다. 타인이 입은 상해를 기뻐하는 도착 감정이다.

인터넷에 함부로 올라오는 악플도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어떤 유명 인사가 악성 댓글을 단 사람들에게 그 어떤 해도 끼친 적이 없는데도 비방과 욕설을 빗발치듯 들어야 한다면, 이야말로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독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는 것과 같다. 야비하고 더럽고 잔인한 죄가 시기심이다. 상대편이 잘 될 때 앞에서 축하하는 척하다가 돌아서서 배 아파하고 끌어내리려는 죄다. 청문회 때 봇물처럼 쏟아지는 온갖 비리 제보도 알고 보면 측근의 시기심에서 온 것이 많다.

교육부에서 자사고, 외고, 국제고를 2025년부터 일괄 폐지하고 일반고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학교 서열화를 막고 공정 교육, 평등 교육을 하겠다는 진보 정권의 취지는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결기를 다지면서, 세계 시장에서 당당히 살아남을 인재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지가 의아하기만 하다.
기독교적 시각으로 볼 때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누구도 더 높거나 더 낮지 않다. 하나님과 법 앞에서 만민은 언제 어디서나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정과 평등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사람을 획일화(평준화)시키는 교육 시스템이 과연 급변하는 세계화 시대에 적절한가를 반문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걸맞게 할 수 있으면 외려 자율형 학교들을 더 많이 늘려서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다만 속칭 신흥 명문고로 부상한 학교들과 학생들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진 수많은 이들이 혹 가질 수 있는 따가운 시선이 자꾸만 평준화 교육을 더 부채질하는 것은 아닐까 매우 조심스럽다. 하나님은 사람을 각각 다르게 만들었고, 다양한 은사와 능력을 주셨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이웃을 공정하지 않게, 평등하지 않게 대하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시기를 '녹색 눈의 괴수'로 비유했다. 초록빛이 감도는 덜 익은 과일을 씹을 때의 맛처럼 시기도 속을 쓰리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의 눈이 녹색으로 변하듯이 시기심에 불탈 때 남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방에서 녹색 눈은 번들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