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규 인천시설공단이사회 의장

 

얼마 전 한 언론사 CEO와 저녁을 함께할 기회가 있었는데 젊은 세대들의 세태변화에 대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습기자를 뽑았는데 일주일도 안 돼 몇 명이 그만두겠다고 사직서를 냈다는 것이다. 연봉이 적어서 그런가 생각했는데 사유가 뜻밖이었다고 한다. 선배기자들의 생활을 보니 개인시간은 거의 없고 오직 일에만 매달려 사는데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취업난에 소위 언론고시라는 관문을 통과한, 어떻게 보면 선망의 직업일 수 있는데 말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8년 국민여가생활 활동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과 여가생활 간 균형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37.3%로 일에 더 집중한다는 응답 36.8%보다 높았다. 여가에 집중할수록 행복수준이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나라도 이제 일과 개인의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 시대가 왔다. 위 조사에 의하면 여가시간 지출비용 모두 매년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여가활동 내용은 TV시청이 45.7%로 높다. 활동유형이 시간보내기 소비행위 위주이고, 삶의 질을 풍부하게 해줄 배움이나 문화활동은 미약한 실정이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고 있다.
출퇴근 시간 전후와 공휴일의 여가시간을 재충전 기회로 활용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휴식과 건설적인 취미 문화활동 등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

필자도 여느 직장인처럼 아침 일찍 출근해서 하루 종일 일에 매달리다 자정이 다되어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결과 비만·고혈압 등 건강 위험요소가 증가했을 뿐 이렇다 할 취미나 문화활동이 없었다. 이래서야 품격 있는 삶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건강유지도 어려울 것 같았다. 매일 아침 30분 걷기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 관심을 두었던 한국화를 배우고 싶어 A대학교 부설 문화예술교육원을 찾았다. 그런데 기존 학생들의 수준이 너무 높고 비용도 만만찮아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동 주민자치센터에 문화강좌가 개설돼 있다는 정보를 알고서도 망설였다. 동에서 하는 거라 수준이 너무 낮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붓 잡은 지 10년 됐다는 중급자들이 다수 있었고, 더욱이 86세의 고참 어르신이 초급자로 배우는 모습을 보고 바로 문인화반에 등록했다. 비용도 3개월에 4만5000원으로 내 수준에 딱 좋았다. 내친김에 가까운 복지관을 찾아 초급일본어도 등록했다. 처음 선입견과는 달리 선생님과 학습생들의 열의가 대단했다.

특히 선생님들이 경험도 많고 믿음이 가서 만족스러웠다. 일본어는 히라가나부터 외우며 시작했으나 그럭저럭 따라갔지만 문제는 문인화였다. 자세, 붓 잡는 법, 점 찍는 법, 선 긋는 법 등 연습을 한 달 두 달 계속하니 손은 온통 먹물이고 지루하고 고통스러워 왜 시작했는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지금 넉 달 째인데 이제야 난치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연습했는데도 난 잎을 그린 것인지 몽둥이를 그린 것인지 참 한심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참 묘하다. 최근에는 그림이 잘되고 못되고에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냥 붓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정신이 집중된다. 욕심이 없어지고 겸손해진다. 옛 선비들의 문인화 그리는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지방자치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시민이 원하는 바를 잘 파악해 그것을 이루어주고 궁극에는 일과 만족할 만한 여가생활이 균형되게 해 행복한 삶이 되도록 뒷바라지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의식과 각오로 체육·문화·복지 등 여러 공공시설들이 운영되어야 한다.

시민들의 여가 문화활동 공간으로 적절히 활용될 수 있도록 시설 확충, 운영 시간, 이용 가격 수준 등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시민과 소통하고 함께하고자 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현재 공적인 문화교육 서비스는 시·구·군·동은 물론 각종 문화예술 기관·단체 그리고 교육청 평생학습관·도서관 등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펼쳐지고 있다. 언제나 문화시민의 방문을 환영하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다. 향후에는 빅데이터를 활용해 시민 개개인에게 적합한 여가활동과 취미 문화예술 활동을 맞춤형으로 찾아주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시스템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정규 의장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 인하대 행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5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조직위 사무총장, 인천시 환경녹지국장·문화관광국장·경제통상국장·부평구 및 미추홀구 부구청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