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눈물을 닦던 미술청년 문화 불모지를 깨우는 작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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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길수 작가의 1984년 작품 '순수의 이름으로'를 재현한 작품.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술운동 소집단 POINT(시점시점)의 1980년 당시 전시회 팸플릿 자료가 전시돼 있는 모습.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술운동 소집단 POINT(시점시점)의 1980년 당시
전시회 팸플릿 자료가 전시돼 있는 모습.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1979년 창립·1984년 '시점시점'으로 명칭 변경

소외된 삶·세태풍자 등 폭넓은 주제 작품에 담아

서울과 관계 의식하며 독자적 지역성 구축 목표

부천·안양·수원 등 문화소외지역서 '경기 순회전'
 


1980년대 매캐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강렬한 예술과 열망을 보여줬던 민중미술 작품은 대중의 뇌리에 여전히 뜨겁게 남아있다.

전위·저항·실천의 정신을 그려냈던 격동의 시대 속 현대미술사, 미술운동을 활발하게 견인했던 경기지역의 소집단과 이들의 작품을 이제는 볼 수 있다.

인천일보는 경기도미술관 특별기획전, '시점時點·시점視點_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에 기인해 당시 경기지역에서 활발히 미술운동을 전개해 온 소집단과 예술인들을 만나 당대의 자료와 작품 활동 등에 대해 들어본다.
 

 

 

 


 POINT(시점시점)는 


포인트는 1979년 12월 창립전을 계기로 수원 화단에 등장했다. 창립회원으로 백종광, 장영국, 최춘일이 참여했고 1980년에 열린 2회 전시회부터는 이억배, 박찬응, 문석배, 강문수, 정길수가 합류했다. 이후 1984년 집단의 이름을 '시점시점'으로 변경하고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시점시점은 기존에 뚜렷한 경향없이 개별적인 작품활동만 전개하고 예술계를 비판하며 현대미술에 바탕을 둔 좀 더 의식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다양한 장르의 표현 형태를 통해 실존적 요소와 사회와의 관계, 소외된 삶, 세태풍자, 개인적 문제의식 등의 폭넓은 주제에 접근했다. 이 단체는 그룹 명칭이었던 'POINT', '시점시점'이 의미하는 것처럼 동시대 미술에 대한 자각과 아울러 그 주체적인 시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진일보한 집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서울과의 관계성을 의식하면서 독자적인 지역성을 구축해보겠다는 의도에서 부천, 안양, 수원 등지를 돌며 문화 불모지를 중심으로 '경기 순회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현대적인 미의식을 근간으로 한 작품 활동을 전개했던 '시점시점'은 이후 내부의 분기된 흐름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연대기 


▶창립년도 : 1979년 12월
▶창립회원 : 백종광, 장영국, 최춘일

▶1979.12. 창립전시회 'POINT-79' 개최
▶1980.10. 'POINT-80' 전시회 개최
▶1981.6. 'POINT-81' 전시회 개최
▶1984.5. 소집단 명칭 변경 POINT→시점시점
▶1984.9. '시점시점-84' 전시회 개최
▶1985.2.22.~26. '시점시점-85 : 군중 속에서' 경기도(수원, 안양, 부천) 순회전 개최


 선언서 


현대미술의 동향이 이제 극에 달한 듯 우리에게 수많은 추종을 요구한다. 물론 그것은 한 시대인으로서 우리에게는 타당하고 수긍할 수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우리가 처하고 있는 시대적 지평에 대해 가장 평범하고 소박한 가능성을 우리 스스로에게 제시해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또 은연중에 우리에게 스며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사변적인 구조 이론과 인간적인 공복의 괴리를 메꾸어 나갈 수 있는 그 어떤 것의 필요성에 대한 비전의 동시적인 결합이 있어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실험되어 오는 작품들의 현실적인 구조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의 진의를 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공허로 돌아간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미술의 새로운 해소 방향을 탐색해야 한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되어 왔다는 것이 표면화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의 가능성과 견지 많은 이야길 할 수 있을 뿐이다. 아직은 깊은 통찰과 진지한 숙고를 거부해왔던 우리의 평범하고 소박한 시도들이 우리가 우려했던 바로 그 난점을 해결할 수 있을지는 확실히 모른다. 그것은 하나의 시점으로서 입장밖에는 밝힐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


 시점·시점_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 


▶기간 : 2019년 10월29일~2020년2월2일
▶장소 : 경기도미술관 2층 기획전시실(안산시 단원구 동산로 268 화랑유원지 내)

이 전시는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변화의 축을 견인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낸 경인, 경수 지역의 소집단 미술운동을 당대의 자료와 작품을 통해 새롭게 조명한다. 팸플릿, 리플릿, 포스터, 전단지, 메모, 기관지, 소식지,엽서, 달력, 초대장, 스크랩, 편집, 밑그림 등 20~30개 이상의 소집단 활동 자료가 전시를 통해 소개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1980년대 경찰에 압수돼 자취를 감추었던 주요한 미술작품 330여점과 자료 1000여점을 30년 만에 공개한다.
 


 

"포인트, 현대미술 틀 부수고 민중미술 모태 역할"

 

▲ 미술운동 소집단 POINT(시점시점)의 일원이었던 이억배 작가가 소집단 활동 당시를 떠올리며 설명하고 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미술운동 소집단 POINT(시점시점)의 일원이었던 이억배 작가가
소집단 활동 당시를 떠올리며 설명하고 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시대 고발자_POINT 이억배 인터뷰]


파격적 작품으로 암울한 시대에 대한 감정 드러내 "무서울 것 없었어…예술 하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

"예술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인트(시점시점)는 민중미술의 씨앗이자 태동이었습니다."
80년대 당시 미술운동을 펼쳤던 소집단 가운데 유일하게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억배 작가는 지난 11일 그의 서재에서 혹독했던 지난 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오늘날 '시점시점'의 전시는 누구보다 그에겐 큰 의미로 다가왔다.

"당시의 우리가 해 왔던 미술 활동들은 역사 속에서 기록되지 않은 채 사라진 것들이었죠. 외면당했던 우리의 활동, 그리고 역사가 이제라도 복권됐다는 사실이 반갑습니다."

이 작가는 수원과 안양을 중심으로 소집단 미술 운동을 활발히 전개해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재학 중이던 이 작가는 당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최대 관심사로 여겼다. 3학년이 되던 해, 야외 조각 전시에서 선보였던 그의 작품이 철거된 사건을 계기로 미술운동을 펼쳐오던 소집단에 처음으로 몸을 담게 됐다.

"야외 조각 전시에 내놓은 저의 작품이 당시에는 반사회적 의도로 여겨 철거됐죠. 이 사실을 투고하게 되면서 교내에 알려지게 됐고 결국 기득권층이라 불리는 이들이 쏟아낸 폭언 앞에 모멸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마치 제겐 폭력으로 느껴졌습니다. 표현의 자유 앞에 저의 작품을 철거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이때 민중 미술사에 기록될 만큼 중요 소집단으로 알려진 두렁에서 미술운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후 수원으로 영역을 넓힌 이 작가는 백종광, 장영국, 최춘일로 구성된 포인트 일원으로 참여,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게 된다.

포인트는 추상주의적인 현대미술을 지향했던 청년 미술인들의 모임이었다. 기존의 보편적인 틀을 벗어나 파격적이고 신선한 작품들로 암울했던 시대에 느낀 감정들을 서슴없이 표현했다.

"포인트는 기존의 현대미술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 민중미술의 모태가 된 단체였죠. 미술이 순수주의에만 머물 게 아니라 사회나 역사적인 범위로 시야를 넓혀 작품 활동을 하자는 게 포인트가 지향하는 목표였습니다. 또 서울의 전유물 같았던 문화를 문화소외지역으로 분류되던 수도권으로 확장시켜 보다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미술을 구축하기 위한 활동들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게 됐습니다. 경기순회전을 통해 서울에 의존적이던 기존의 미술을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힘을 실은 것 또한 포인트가 남긴 성과였습니다."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짧다면 짧은 6년의 시간 동안 8명의 청년들은 억압의 시대를 향해 과감한 메시지를 던져왔다. 그들이 부르짖은 표현의 목소리는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의 개막에 주춧돌이 됐다.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예술을 하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예술인들은 사회를 향해 정답이 아닐지언정 끊임없이 물어야 했고 고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