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예술가들,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울고 웃다
▲ 14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렉처콘서트, 부평 콜트콜택 공장의 이웃집 예술가들' 콘서트에 참석한 예술가들이 공장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사람들에게 일은 무엇일까. 직장인들에게 회사는 어떤 의미일까.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는,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둔 주인공이 평범한 직장인의 출근길을 보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직장에서의 탈주를 꿈꾸는 이들조차 일을 하며 삶의 가치를 찾아가듯, 우리에게 '노동'은 애증 어린 존재다.
인천 부평구 갈산동에도 한때 '세계 최고의 악기'를 만든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던 이들이 있었다. 전 세계 기타 생산량의 30%가량을 책임진다는 '콜트(CORT)' 브랜드의 부평 공장. 지난 2007년 노동자들이 해고되면서 공장도 사라지고 가스충전소만이 그곳에 세워져있다.

하지만 일터를 되찾기 위해 부평과 대전 공장, 여의도, 서초동 대법원 등 거리 위에서 싸워온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모습은 다양한 문화예술 작품으로 남았다. 노동자밴드가 직접 부르는 노래, 연대하던 예술가들의 그림, 연계 프로젝트 활동 전시 속에서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다. 문화예술 작품 속에서 인천 노동운동의 기록은 13년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일 인천시립박물관 석남홀에서는 '메이드 인 인천-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 특별전 연계행사로 전진경·정윤희 작가의 '렉처 콘서트'가 열렸다. 두 작가는 '문화운동으로 바라보는 인천 노동자의 삶'을 주제로, 콜트·콜텍공장 노동자들과 보낸 부평공장에서의 시간들을 그들의 작품을 통해 소개했다.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울고 웃던 그들의 기억을 쫓아가보자.

#2012년, '부평공장'에서 함께.

"부평 콜트공장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잊지 못합니다. 처음엔 독특하고 낯선 공간이었던 공장은 우리 모두에게 다양한 연대가 이뤄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어요." (정윤희 작가)
전진경, 정윤희 작가는 부평공장에서 머물렀던 10개월을 '좋은 시절'로 표현한다. 이듬해 겨울에 쫓겨나기 전까지 예술가들은 공장 앞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던 해고 노동자들의 '이웃'이 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장에서 노동자와 예술가들을 내쫓으려는 시도에 함께 맞섰고, 밤낮없이 보드게임을 하며 고된 생활을 잊거나 때때로 기타 연주, 그림 작업, 아카이빙 등을 도우며 힘든 시간을 버텨냈다. 그래서 공장에 모인 작가들은 스스로를 '이웃집의 예술가들'로 불렀다.

"하루는 전선을 다 뜯어버리는 등 나가라는 압박이 심하게 들어온 거예요. 싸울 수 없으니까 아무 말도 못 하고 참았는데 화가 나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날 '가볍게 짐 푸는 마음'을 담아 낙타 벽화를 그리게 됐어요."(전진경 작가)

시간 흐름이 가늠되지 않는 작은 창문이 대부분인 공장 내부와 달리 전 작가가 작업실로 쓰던 공간은 유일한 볕이 들어오는 공간이었다. 노동자와 예술가들은 자연스레 전 작가의 작업실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쪽 벽에 새겨진 4.5m 폭의 낙타 그림처럼, 노동자들과 예술가들은 공장에서 최대한 머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전한다.

#2014년, 공장 사라지고 국제연대를 꿈꾸며

부평 콜트공장에 자리잡은 '이웃집의 예술가들'은 공장 내에서 문화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해고투쟁 2000일을 맞아 진행한 공장예술제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가들로 인산인해였다. 개인·그룹별로 20개 주제 전시가 공장 층층을 가득 메웠으며, 인디밴드들의 노래도 함께 울려 퍼졌다.

이와 함께 정윤희 작가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인권에 초점을 맞춰 아카이빙 작업을 진행했다. 버려진 공장 속에서 창문이 없는 퀴퀴한 공장 속에서 천 마스크를 쓰고 일했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발굴해냈고, 노동자들의 해고투쟁 역사를 조명하며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3년 2월 노동자들과 예술가들 모두 공장 밖으로 내쫓겨나게 된다. 공장은 허물어졌고 곳곳에 새겼던 해고투쟁의 흔적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이후 노동자들은 여의도 새누리당사, 광화문 광장 등을 옮겨 다니며 천막 농성을 계속했고, 예술가들도 각자의 작업실을 찾아 떠나갔다.

하지만 일부 예술가들은 새로운 방식의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국내 공장의 문을 닫은 후 사실상 생산 거점 공장이 된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공장을 찾아 '예술행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공장 앞에서 텐트를 설치하고 유기용제를 쓰는 공장에서 쓸 수 있는 산업용 마스크를 나눠주며, 현지 노동자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머무는 7일 동안 매일 밤마다 마스크에 알파벳을 도장으로 새기는 작업을 했어요. 이후 노동자들을 글, 사진, 그림 등으로 기록하고 전시회에서는 그들의 모습을 '인권(Humanity)'과 '노동자(Worker)' 등으로 조합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정윤희 작가)

#2015년 이후, 또 다시 거리에서 함께

지난 5월 콜텍 노사는 최종 합의서를 작성하고 13년 복직 투쟁의 마침표를 찍었다. 공식 사과 대신 유감을 표하고 복직 보장 기간도 한 달에 불과했으나, 장기간 거리에서 싸워온 노동자들에게는 의미가 있는 합의였다.

하지만 방종운 민주노총 금속노조 콜트악기 지회장은 여전히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앞에서 농성을 지속 중이다. 지난 2012년 콜트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를 부당하다고 인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다시 3개월 만에 노동자들이 해고되는 등 제도상 노동권이 보호되지 않는 미비점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공장이 사라진 후 거리에서의 천막투쟁으로는 올해 7년째다.

전진경 작가는 2015년부터 일주일에 하루 1시간이라도 노동자들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겠다는 목표로 농성장을 찾기 시작했다. 천막에 앉은 전 작가는 해고 노동자들의 표정을 자신의 그림에 담아냈다. 그림에서 노동자들은 길거리에 피켓을 두고 지친 듯 앉아있거나, 때로는 단식투쟁을 하며 복잡한 표정을 보인다. 그렇게 3년 6개월치 이어진 '천막드로잉'은 투쟁의 역사로 남은 동시에, 고된 시간을 버티는 그들의 원동력이 됐다.

"3년 넘게 천막 농성이 이어질 때쯤, 대전에서 오가던 이인근 콜텍지회장이 일주일 넘게 나타나지 않은 적 있었습니다. 별의별 생각이 들던 중에 '천막드로잉 하는 날 맞춰왔다'며 무심히 이 지회장이 나타나더고요. 그때 제가 감사하다고 말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전진경 작가)

/김은희 기자 haru@incheonilbo.com
 



전진경 작가는?

▲ 전진경 작가
▲ 전진경 작가

1973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전진경 작가는 용산, 기륭전자,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강정마을, 콜트·콜텍 등 사회적 갈등이 벌어지는 장소에서의 문화예술 활동을 계속해왔다.


지난 2012년 폐업으로 버려진 인천 부평 콜트공장에서 해고 노동자들과 지내며 첫 개인전시회 '내가 멋진 걸 보여줄게'를 열었다.

이후 부천 대안공간 아트포럼리에서 '아는사람(2013)', 서울 온에어갤러리에서 '가두어야 하는 나의 미친 귀염둥이(2015)', 서울 경의선공유지 EPS미술관에서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천막농성을 기록한 '변하지 않아.EPS(2019)' 등을 진행했다.

또 전 작가는 그림책을 만들기도 했다. '빈 공장의 기타 소리'와 '맥을 짚어 볼까요?'를 쓰고 그렸으며, '이대열 선생님이 들려주는 뇌과학과 인공지능'과 '두 얼굴의 에너지, 원자력' 등은 그림으로 참여했다.
 



정윤희 문화연구자·작가는?

▲ 정윤희 문화연구자·작가
▲ 정윤희 문화연구자·작가

정윤희 작가는 아시아의 노동과 이주, 인권, 도시개발 등을 주제로 창작과 연구 활동을 진행 중인 인천 작가다. 최근 지역문화예술 생태계의 자생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공론화를 모색하면서, 지역·도시·문화 비평지인 '시각'의 편집 주간을 맡고 있다.


지난 2008년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인권카페에서 첫 개인 프로젝트 '월경(越境)'을 시작으로, 2010년엔 인천 스페이스빔에서 두 번째 개인 프로젝트 '패키지 아시아(Package Asia)'를 열었다.

2018년에는 인천 부평 콜트공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인도네시아 콜트악기 공장 앞에서 예술행동 프로젝트 '헥테로토피아(Heterotopia) 421-1'를 진행했으며, 2018년 스페이스빔에서 동일한 제목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김은희 기자 haru@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