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빛 물들인 고대 첨단기술은 '보물'로 남았다

 

송나라 접어들면서 청자 유행
황제 쓰는 그릇 전부 바꿀 정도

고려 역시 생산 기술력 갖춰
그림 그려넣는 '상감청자'로
세계 최고의 수준 인정받아

교역 수로는 '도자기의 길'로 불려
강화 연미정에 도착한 조운선
조류 기다려 한강으로 올라가



인류는 음식을 저장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토기를 만들었다. 이때의 토기제작 기술은 초보적인 단계여서 물을 담으면 쉽게 부서졌다. 이런 한계는 고온의 열을 가둘 수 있는 가마의 발명과 함께 해결됐다. 토기 제작이 활발해지자 제사용이나 왕이 권위를 상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가마의 온도를 1000도 이상 올릴 수 있게 되자 보다 뛰어난 품질의 자기(瓷器)가 생산되었다. 질 좋은 자기의 생산은 고대의 첨단기술이었다. 첨단 기술상품은 어느 곳에서나 인기가 좋기 마련이다. 왕실과 귀족층에서는 너나없이 귀하고 독특한 자기를 소유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소비층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은 자기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의 반열에까지 올려놓게 되었다.

당나라 시대 이후로 청자와 백자가 생산되었다. 송나라에 접어들자 청자가 크게 유행했다. 송의 휘종은 아예 황제가 쓰는 그릇을 모두 청자로 바꿨다. 이에 귀족들도 청자를 애호하자 청자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황해를 넘어 한반도와 일본은 물론 인도양을 건너 서양으로까지 전해졌다.

고려도 청자를 생산하는 기술력을 갖췄다. 명나라 초기까지 중국의 제작기술과 맞먹는 수준의 자기는 고려와 조선이 유일했다. 특히, 자기 위에 그림을 그려넣은 '상감청자(象嵌靑瓷)'는 중국의 기술을 뛰어넘어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 이런 까닭에 고려청자는 특유의 색과 양식을 인정받아 중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경쟁력 있는 특산품이 되었다.

도자기는 무겁고 깨지기 쉽기 때문에 육로로 운송하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대부분 수로를 통해 배로 운송했다. 이는 많은 양을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청자는 중국의 자기들과 함께 황해를 오갔다. 송나라 상인들은 자국의 청자를 수출하고 고려의 청자를 수입했다. 아울러 중개무역으로 재수출하기도 했다.

신안 앞바다에서 난파되어 인양된 보물선은 중국 남쪽의 국제항구인 닝보(寧波)를 출발하여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가는 상선이었다. 이 배에서 총 2만3500여점의 유물을 인양하였다. 이중 2만600여점이 도자기였다. 이 중에는 고려청자도 7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청자의 제작시기가 침몰시기보다 백년이나 앞선 것들이었다. 이는 송나라 상인들이 수입한 고려청자가 다시 일본에 수출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고려청자는 이토록 인기 있는 특산품이었던 것이다.

비단은 초원길과 사막길을 통해 교역되는 주요 품목이었다. 도자기는 바닷길로 교역되는 주종 품목이었다. 그래서 바닷길을 일명 '도자기의 길(陶瓷之路)'이라고도 부른다.

아랍여행가 이븐바투타는 중국 광저우(廣州)에 들러서 당시 도자기 수출로 번창한 항구의 모습을 이같이 기록했다.
'중국 도기(陶器)야말로 도기 중에서 최상의 것이다. 광저우는 대도시 중 하나로 시가지가 대단히 아름답다. 가장 큰 시장은 도기시장으로 이곳에서부터 중국 각지는 물론 인도, 예맨 등지로 수출된다.'

고려청자의 제작은 개경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질 좋은 흙은 구하기 위하여 주로 호남지역에 집중됐다. 인천 서구 검암동에도 고려시대의 녹청자도요지가 있다. 이곳은 11세기 초기에 세워졌는데 녹갈색의 거친 유약을 사용하여 무게가 가벼운 청자들을 제작하였다.

고려는 조세를 현물로 거뒀다. 이에 곡식은 물론 도자기를 운반하는 뱃길이 필요했다. 뱃길은 서해연안을 따라 개경에 이르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풍랑과 침몰 등의 사고로 피해가 컸다. 고려 조정은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도 시행했다.

조운선(漕運船)이 정한 기한 내에 출발했으나 바람이 순조롭지 못해 키잡이 3명, 배꾼과 잡부를 포함 5명 이상이 물품과 함께 침몰한 경우에는 조세를 징수하지 않았으며, 기한보다 늦게 출발했으나 키잡이와 배꾼의 1/3이 빠져 죽은 경우에는 고을의 책임자와 뱃일 관련자들이 평균하여 징수토록 하였다. 조운선도 장마나 태풍이 오는 시기를 피해서 운영했다.

조선시대의 조운선은 한양으로 통했다. 강화의 월곶리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다. 이곳은 한양으로 들어가는 물길의 시작점이자, 합류한 강물이 황해로 나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강화10경의 하나인 연미정(燕尾亭)이 있다. 이곳의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연미정에 오르면 북쪽으로 개풍군과 예성강 물줄기가 보이고, 동으로는 김포시가 눈에 들어온다. 고대에는 황해를 지나온 배가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간만의 차가 심한 곳이었기에 한양으로 가는 배들은 모두 이 정자 밑에서 닻을 내리고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올라갔다.

조선시대 선비인 고재형(高在亨)은 이곳에 올라 명승절경을 둘러보고 '연미조운선(燕尾漕帆)'이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연미정 우뚝 섰구나, 두물머리 사이에(燕尾亭高二水中)
삼남지방 조운길이 이 앞에서 통했다네 (三南漕路襤前通)
이 길 오가던 수많은 배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浮浮千帆今何在)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순박한 풍치였건만 (想是我朝淳古風)

청자 제품은 귀한 것이어서 귀족들의 묘지명으로도 사용되었다. 세조의 장모이자 정희황후의 어머니는 인천이씨였다. 그의 묘역에서 청화(靑畵)로 만든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이는 현존하는 청화백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 인천이씨 청화백자 묘지석
▲ 인천이씨 청화백자 묘지석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청화백자는 세조의 장모인 인천이씨의 묘지석]

지난 2001년, 경기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 일대의 파평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에서 사초작업을 하던 중, 윤번의 부인인 인천이씨의 묘 앞에서 석함(石函)이 발견되었다. 석함 안에는 백자로 만든 지석(誌石)이 6장 들어 있었다. 그런데 가운데 4장의 지석은 앞면은 청화(靑畵)로 만들고 그곳에 지문(誌文)을 적어놓았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묘지의 주인은 인천이씨로, 세조의 장모이자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어머니인 흥녕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이었다. 1456년 7월14일에 세상을 뜨고 10월8일에 매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청화백자 묘지석은 지금까지 알려진 청화백자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를 통해 청화백자의 사용시기와 편년(編年)을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현재 보물 제176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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