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하면 내 그림 먼저 생각나겠죠"
▲ 황은정씨가 페루 마추픽추에서 여행드로잉 작업을 하고 있다(아래쪽).'페루 마추픽추' 작품.
▲ '세상을 바라본 여행드로잉' 책을 들고있는 황은정씨.
▲ '세상을 바라본 여행드로잉' 책을 들고있는 황은정씨.
▲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모레노빙하의 실제모습과 황은정씨가 그린 스케치가 함께 놓여있다.
26세에 사표던지고 여행길

34개국 도시 100여곳 누벼

나만의 특별한 여행하고파

서른살에 학원서 그림배워

남미·동유럽 100일 대장정

눈 앞 장관들 종이에 새겨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아니 누구나 그릴 수 있다. 오늘만큼은 보통사람의 글쓰기가 아닌 그리기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하기 쉽지 않다는 '그리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 편에 사표 하나쯤 품고, '내 언제가 이것을 던지고 세계일주를 떠나겠노라 다짐하지만 여전히 다짐만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여기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없었던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리기 작업'을 한 용감한 여성이 있다.

가슴에 품었던 '그것'을 과감히 던지고 세계일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세계반주(?)를 떠난 용감한 여성이 여행 책을 그려냈다.

보통사람들은 여행의 기억을 사진으로 남기지만 보통사람인 그는 카메라 대신 붓을 쥐었다. 1초의 셔터 누름 한번이면 될 일을 30분이고 1시간이고 그날의 기억을 보다 깊숙이, 보다 오래도록 그림으로 새겨나갔다.

# "사진 속의 풍경보다 내가 그린 그림이 먼저 떠오를 것 같아요"

'마추픽추에서 누구나 앉아서 사진을 찍는 그 장소 옆에서 사진 대신에 바닥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냥 볼 때는 몰랐었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바라보는 마추픽추의 모습은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르게 다가오면서 멋진 모습이었다.

'마추픽추 하면 사진 속의 풍경보다 내가 그린 이 그림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본 여행드로잉中에서〉

26세가 되던 해, 복지관에서 교육 강사 일을 하던 황은정(39)씨는 퇴사를 선언하고 무작정 여행길에 올랐다. 무료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몸부림은 벌써 34개국 100개 도시를 누볐다.
여행의 방임으로부터 오는 회의 속에, 문득 누구나 하는 식상한 여행이 아닌 특별한 나만의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최근 여행트렌드로 자리 잡은 '어반스케치' 혹은 '여행드로잉'이 그의 머리를 스친 순간이었다.

어반스케치는 일상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는 것이 아닌 그림으로 간단하게 그려 남기는 방식으로 몇 년 사이 미술계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미술 장르를 일컫는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특별한 장소를 더 특별하게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고 특별한 장소라도 식상해지기 마련이죠. 그러나 그림은 달랐어요 사진이 담지 못하는 그날의 추억도 담아낼 수 있거든요"

# 그림으로 여행을 떠나다
'아마도 3번째 수술을 하고 났을 때였던 것 같다 움직이지 못하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그때 구독하던 여행잡지에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을 오려서 뒷부분이 보이게 붙이고 이 그림을 그리면서 나의 수술 경과가 좋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2년 전에 나는 이 예수상이 있는 곳에 내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참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남은 아픔과 잔상은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나가게 되더라는 점' <세상을 바라본 여행드로잉中에서>

어느덧 그의 나이 서른. 어떤 것을 섣불리 시작하기도 주저앉기도 겁이 나는 서른.

그러나 그는 망설임 없이 동네 미술학원을 찾아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입시생 틈바구니에서 다 큰 성인이라곤 그 밖에 없었지만 배움의 열망 앞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불의의 사고로 다리가 불편하게 됐어요. 여행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치명타였죠. 그러다 여행을 앉아서도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그림으로 한번 그곳을 다녀오자라는 생각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미술학원을 찾았죠"


#100일간의 남미 여행
약도 없다는 '여행병' 투병 중이던 그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또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2016년 2월22일, 100일간의 남미와 동유럽 여행이라는 대장정의 서막이 오른 것도 이 날이었다.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까지 이름조차 생소한 남미와 동유럽의 방방곡곡을 누비며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을 종이 위에 새겨나갔다.

영어가 서툰 탓에 '누가 영어로 말을 걸어오면 어쩌나'라는 생각으로 지내온 100일이었다.

"긴 시간 여행하다 보니 갖가지 에피소드도 많았어요. 캐리어를 통째로 잃어버리기도 하고 환전을 하다 일부는 도둑맞기도 하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다시 가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단연 남미라고 외치겠습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 4개월이 지났을 즈음, 100일간의 남미 여행기와 어반스케치를 엮은 그림 도서 '세상을 바라본 여행드로잉'을 출간했다.

'세상을 바라본 여행드로잉'은 여행지의 생동감 있는 도시 전경의 삽화들과 갖가지 에피소드, 여행 가이드 팁을 소개하고 있다.

2년 전의 추억들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광명시 광명동에 '북앤드로잉'이라는 이름의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3월에 문을 연 '북앤드로잉'은 독립출판 서적의 판매뿐 아니라 황은정씨가 직접 지도하는 여행드로잉 수업도 매주 진행된다.

"단순히 제가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작업실이 필요해서 운영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저와 같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많은 분들이 찾아주고 계세요. 꿈을 위해 주저할 필요도 망설일 필요도 없습니다. 도전하세요. 북앤드로잉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