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조 인천대 교수
스위스 취리히와 루체른의 중간쯤에 호수를 낀 아름답고 조용한 도시 추그(Zug)가 있다. 이 호반 도시 추그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권리'쯤 되는 어원을 갖고 있다고 한다. 호수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호수 주변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그림 같이 아름다운 이 도시는 은퇴자들의 천국으로 여겨지며 첨단 기술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곳에 비트코인과 더불어 널리 알려진 이더리움 본사가 위치한다. 추그는 이제 '크립토 밸리'라고 불리며 블록체인 기술의 세계적 중심지로 되었다. 인구는 3만이지만 2만7천여 개 기업이 둥지를 틀고 있다. 낮은 법인세를 무기로 전 세계 기업을 유혹한다. 그러나 특별히 이 곳이 블록체인과 그 응용기술인 암호화폐 기업들의 명당으로 떠오른 것은 추그 지방정부 정책 덕분이다.

이 도시에서는 공공 요금을 비트코인으로 결제할 수 있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현지 화폐인 스위스 프랑으로 교환해 주는 ATM 기기가 운영된다. 암화화폐에 대한 개방성과 정책적 투명성 때문에 이 곳은 핀테크 스타트업 기업들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시험하는데 최상의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 6월25일부터 7월2일 사이에 추그에서는 지방 정책 이슈에 대해 모든 유권자를 대상으로 지역 투표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투표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전자 투표로 진행되었다. 주민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휴대폰을 이용해 편리하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추그 지방정부는 이 과정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전자 투표 기술의 여러 면을 평가하였고 이번 시범 투표가 성공적이었다고 발표했다. 얼마 전 지방선거에서 우리는 경건하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투표권을 행사했다. 정해진 투표소를 찾아가 선거인 명부를 확인하고 투표 용지를 받아 도장을 찍어 기표한 후 투표함에 넣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투표와 개표에는 시간과 비용이 아주 많이 든다. 종이에 기표하는 대신에 버튼을 눌러 컴퓨터에 기록하고 저장하고, 그 결과를 계산하면 시간이 절약될 것이다.

이러한 전자 투표 아이디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여러 나라에서 크고 작은 규모의 전자투표가 이뤄져 왔다. 국회도 기명 전자투표 방식을 도입·운영하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전자투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자투표가 넓게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전자투표 시스템의 기술적 완성도가 투표 부정 및 오류 우려를 해소시키기에 부족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스위스 추그 지방정부가 시도한 전자투표 운영 사례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여 이러한 우려를 해소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블록체인은 거래 정보, 투표 내용 등을 담은 '블록'을 줄줄이 엮어 고리(체인)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각 블록은 그 정보의 변경이 불가능하도록 보증해주는 암호 키를 포함하고 있으며, 체인으로 엮인 바로 전 블록이 정말 원래 그대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암호 키를 갖고 있다. 따라서 줄줄이 엮인 블록들은 순서대로 바로 앞 내용이 맞다는 것을 보증하기 때문에 모든 블록의 내용을 검증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닌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블록체인 기술의 가장 큰 특징은 이러한 블록들이 어느 한 곳에 저장되지 않고, 블록과 관련된 여러 컴퓨터들에 저장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블록체인 기술을 응용한 암호화폐 거래 장부는 은행이 없어도 거래에 참여하는 모든 사용자들이 장부를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블록체인의 특징은 전자투표 시스템에 적합하다. 일반적으로 전자투표 시스템은 무기명성을 보장하여야 하며, 투표 부정의 가능성이 없도록 안전하여야 하며, 신뢰할 수 있는 검표 가능성을 보장하여야 한다. 블록체인을 활용한 전자투표 시스템에서는 이론적으로 모든 투표 참여자가 투표 결과를 검증할 수 있다. 따라서 투표 부정의 우려를 해소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예탁결제원을 포함한 여러 기관에서 블록체인을 응용한 전자투표시스템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최근 암호화폐에 대한 과도한 투자와 채굴 등과 관련된 여러 사회 경제적 문제점이 부각되면서 사회 일각에 부정적인 여론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위스 추그의 예로 알 수 있듯이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개방적 정책과 긍정적인 태도는 새로운 핀테크 기반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도구로서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블록체인 기술은 전자투표 시스템뿐만 아니라 직접민주주의나 대의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다. 대한민국의 '크립토 밸리'가 인천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