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인천서예협회 고문·시인
6년 전쯤 된 것 같다. 조그만 기관지를 기획·편집하고 있을 때, 최영섭 선생과의 대담 내용을 특집으로 올리는 일이었다.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배경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참, 인사부터 드리고 글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 올해로 미수(米壽)를 지나 백수(白壽)를 앞에 둔 선생께서는 강녕하신지요?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사거리에서 태어나 9살이 되던 해 동구 화평동으로 이사하여 본적을 옮기게 된 해가 1939년. 그이는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한 '인천인'이다.

서울대 음대(작곡)를 졸업한 후 비엔나 국립음대에서 지휘를 사사하고 돌아온 최영섭 선생은 인천여중 음악교사를 거쳐 KBS에 몸을 담고 음악활동을 하며 '그리운 금강산'을 탄생시켰다.
더 정확히 탄생의 비화를 펼쳐보자. 강화군 화도면과 양도면은 면의 경계지역으로 한상억 선생과는 지척에 살고 있었는데, 1958년 '이 주일의 노래'라는 프로그램에 <한강물 마르지 않고>를 작곡하여 내보냈더니 요즘으로 치면 준 히트를 쳤다고 한다. 그 후로 한상억 선생에게 작시(詩)를 부탁해 <압록강은 흐른다> <백두산은 솟아 있다>가 방송을 타더니 해외에서까지 단파 라디오로 곡을 듣고는 성원을 보냈다.

어느 날 방송국에서 만난 이가 "한강, 낙동강, 백두산, 남해, 동해 노래는 다 있는데 왜 금강산 노래는 없습니까?"라고 따져 묻길래 아차 싶어 인천으로 한걸음에 달려와 한상억 선생의 초고(詩)를 1961년 8월 26일에 받고 다음 날 악보를 완성해 녹음에 들어갔다. 녹음 현장에서 합창단과 교향악단 단원들의 폭발적 반응을 잊지 못해 하셨던 6년 전 기억이 새롭다.

뜬금없이 왜 '그리운 금강산'에 얽힌 이야기냐고 할지 모르겠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돼 화해 무드의 비핵화 통일로 가는 시대에 나 혼자만의 기우일까. 다시 1972년에 있었던 일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사회 반공교육에서 표현되고 가르쳤을 때 우리는 북한을 '괴뢰', '빨갱이', 그리고 아주 나쁜 사람으로 배웠었다.
남북 적십자회담이 시작되던 1972년에 중앙정보부 문정담당자가 전화로 "머지않아 한국의 예술단체가 평양에서도 연주하고 서로 교류 음악제가 열릴 텐데, '그리운 금강산'의 가사를 개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즉시 고친 가사가 지금의 '그리운 금강산'으로 불린 것이다. '짓밟힌 자리'는 (→예대로인가) '우리가 맺힌 원한'(→우리 다 맺힌 슬픔) '더럽힌 지 몇몇 해'(→못 가본 지 몇몇 해) 등으로 가사가 바뀌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성악가 안젤라 게오르규, 플라시도 도밍고, 볼쇼이 합창단, 프랑스의 드 파야 목관합주단을 비롯해 조혜정과 조수미 등이 CD와 DVD로 제작했고 2002년 월드컵 폐회식장, 요코하마에서 스리 테너와 한국의 성악가 3명을 더해 6명이 노래하여 세계 인구의 절반이 들은 그 노래는 이제 어떻게 이 시대에 바뀔까. 아니면 한 번 바뀐 그대로일까. 나만의 기우치곤 과민한 반응이 아니길 빌 뿐이다.
1993년에 상재된 한상억 선생의 유고시집 <그리운 금강산>에서도 옛 시 그대로이지만 개사를 한 후 월남한 가족과 고향을 떠나온 성악가들은 고친대로 부르지 않았다는 일화를 말하는 작곡가의 마음고생 또한 적지 않았다는 말이 왜 생생히 기억되는지 모르겠다.

최영섭 선생과 한상억 시인이 인천(강화)에 거주·교류하며 탄생된 <그리운 금강산> 국민가곡은 2000년 8월15일 노래비로 문화예술회관 경내에 새얼문화재단에서 세워 인천인의 가슴에 남아 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거리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노래비는 가로·세로 각 1m에 불과하지만,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그리운 금강산'의 노래비를 바라보면 가슴 뿌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