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 아침에 배달된 한 인천 학도병의 사연(인천일보 6일자 19면)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6·25 학도병 고(故) 정해용. 1950년 당시 중학생이던 그는 16살의 나이로 스스로 전선으로 달려가 3개월 뒤 전사했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는 조국의 명운을 붙잡기 위해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책을 덮고 총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그 순결한 젊음은 광란의 전쟁터에서 한 떨기 꽃처럼 쓰러져 갔다. 세월이 흘러 그의 아우들이 맏형의 흔적 찾기에 나섰다고 한다.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마침내 오는 15일 64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받게 됐다는 사연이다.

그 값진 희생 뒤에 남은 것은 한 장의 전사통지서 뿐이었다. '1951년 3월11일 강원도 횡성군 안흥지구에서 적과 교전 중 관통상으로 전사.' 혼돈의 시기, 보훈 행정조차 있는 듯 없는 듯하던 시절을 거치면서 학도병 정해용은 사뭇 잊혀져 갔다. 먼저 간 맏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을 부모들은 아예 얘기조차 꺼내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60여년간 큰형을 가슴깊이 묻어 온 아우들이 나섰다. 그가 다니던 인천 숭의초교와 인천중학교, 국방부, 국가보훈처의 문을 두드렸다. 이미 1954년에 국방부가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려 했지만 가족과의 연락이 닿지 않아 전달이 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 사연은 당시 3000여 명에 이르는 6·25 참전 인천 학도병들의 한 편린이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자유가 회복된 인천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 축현초등학교 운동장에는 3000여명의 소년들이 집결했다. 그들은 학도병으로 참전하기 위해 그 추운 계절에 20일을 걸어 부산으로 갔다. 단기 훈련을 마친 그들은 바로 최일선으로 투입됐다. 제대로 된 군번도, 계급도 없이 사라진 전몰 인천 학도병이 모두 1300명에 이른다.

인천 중구 용동에는 '인천학생 6·25참전관'이 있다. 그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한 학도병이 먼저간 친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은 그들의 희생에 빚지고 있다. 우리는 과연, 그 때 그들의 장한 의기를 제대로 기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