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에서 무덤까지 … 이렇게 고마운 천이 있을까
▲ 씨실과 날실이 교차해 소창을 만들고 있다. 인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은성직물 공장 내부 모습.
▲ 늘솜 강화소창 협동조합원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왼쪽 부터 은춘기(56) 은성직물 대표, 김은선(56) 씨, 김문숙(61) 씨, 강기욱(39) 작가, 김영란(58) 조합장, 김후영(60) 씨.

한번 쯤 옥상 빨랫줄에 줄지어 펄럭이던 기저귀와, 행주를 보았을 것이다.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주던 하얀 천들은 어느 날부터 우리 눈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하얀 천은 '소창'이라 불리는 것으로 목화솜에서 실을 뽑아내 만들어진다. 베틀에서 가로로 놓이는 씨실과 세로로 놓이는 날실이 서로 교차해 조화를 이뤄 만들어지는 평직물이다.

#제주에 갈옷...강화에 소창옷

소창은 나일론과 같은 인조 직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가격경쟁력에서 밀려 사양산업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공장형 직물 산업이 꽃을 피운 1970년, 강화군에는 200여개 정도의 소창 공장들이 있었다.

골목 어귀에는 일을 하기 위해 찾아온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그 당시 강화군에는 방직기 소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그 명성은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소창 공장은 10여개만 남은 상태로, 그중 절반은 가내수공업을 이용한 소규모 단체다. 강화군을 가득 채우던 그리운 방직기 소리는 사라져가고 있었다.

강화 토박이인 김영란(58) 씨는 잊혀 가던 소창의 명맥을 잇기 위해 고군분투중이다. 7년 전 손님이 가져다준 소창 조각을 가지고 옷을 만들어 입은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옷을 한두 개 만들어 입다가 2013년 목동 현대백화점에서 작품전시를 하고, 2017년 강화 중앙시장 패션쇼에 서게 됐어요. 지금은 취미에서 나아가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늘솜 강화소창 협동조합'을 만들었어요."

조합은 지난 1월1일 정식으로 출범했다. 김영란 씨를 조합장으로 해 총 7명이 활동하고 있는 소규모 조직이다. 강화도의 특화 상품인 '소창'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조합의 목표다. 또한 강화에 있는 다문화 여성들을 위한 규방공예 교육과 더불어 여성 일자리 창출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늘솜 강화소창 협동조합은 소상공인진흥공단에서 운영하는 '2018소상공인협동조합 활성화 사업'에 선정돼 지원 받고 있다.

"'제주에는 갈옷이 있고, 강화에는 소창옷이 있다'라는 콘셉트를 가지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는 그런 직물이 됐으면 해요. 소창은 원래 기저귀로 흔히 쓰였는데, 사실 알고 보면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사용이 될 수 있어요. 옷부터 모자까지 그리고 나아가 수의로까지 만들어질 수 있어요."

#지역 특산품화 준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하는 2018년 올해의 관광도시로 '강화군'이 선정되면서 그는 소창의 특화 상품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화군은 소창 산업이 발달된 곳으로, 체험관도 운영하고 있어요. 작년에는 석모도 미네랄 온천에서 소창 수건을 사용할 정도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어요. 저희는 소창을 풍기인견처럼 지역의 특산품으로 부각 시키고자 낮에는 본업을 하고, 저녁에 4~5시간씩 소창 제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어요."

조합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에 있었다. 비록 7명뿐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다. 강화에서 제일 큰 소창 공장을 운영하는 은춘기(56) 은성직물 대표, 체험학교를 하며 공예대전에서 은상을 받은 김문숙(61) 씨, 홍대출신 화가로 디자인과 염색에 일가견이 있는 강기욱(62) 작가, 강화 풍물시장에서 토산품을 판매하는 이경옥(58) 씨, 미싱과 염색 등 생산라인 가동을 담당하고 있는 김후영(60) 씨, 회계를 담당하고 있는 김은선(56) 씨로 구성됐다.

특히 조합의 일원인 '은성직물'은 현재 강화에서 제일 큰 소창 공장으로 원자재를 직접 생산해 원가를 줄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생산과 가공이 한 장소에서 이뤄진다는 것이 조합의 큰 강점이다.

은 대표는 "1994년 강화에 와서 일을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경기도 광주에서 창호를 염색해서 군납을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강화는 지금과 다르게 소창 사업으로 번성하고 있을 때였어요. 소창은 인도와 중국 등에서 수입된 누런 무명실을 옥수수전분과 끓여 하얗고, 튼튼하게 만든 후 실을 건조해야 돼요. 그 다음에 물레로 용도에 맞게 실을 감은 후, 베틀 기계로 씨실과 날실로 짜임새를 만들면 하나의 소창이 만들어져요."

향후 조합원들은 소창 제품 개발을 위해 6월말 강화군도시재생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예정이다. 강화군도시재생대학은 주민역량 강화를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글·사진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강화도 '소창'의 부활조건은] 판로확대·제품개발 정책 지원을

면직물인 소창은 이불의 안감이나 기저귓감 따위로 쓰는 피륙을 말한다. 강화는 직물산업이 발달한 도시였으나, 지금은 10여 곳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강화도는 고려시대부터 직조로 자급자족했다. 농가 부녀자들이 부업으로 반포, 배목면을 만들었던 것이다. 가내 수공업 형태의 직물산업은 1910년대 직기가 개량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

강화직물은 1916년 강화직물조합이 설립되면서 소창과 비단 등을 본격 생산하기 시작한다. 재래식 직기로 면직물과 견직물을 생산하던 강화의 직물산업은 1933년 인조견 공장 조양방직이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설립되면서 기틀을 갖춘다. 이후 공장형 직물산업으로 변모한 강화의 직물산업은 1960, 7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60년대 강화지역 가정집엔 손발로 천을 짜는 수직기가 6000여 대, 직물공장엔 역직기가 1000여 대 있었다고 한다. 직물공장 종업원이 강화읍에만 4000여 명에 달했으며, 강화소창은 짜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조양방직과 심도직물을 비롯해 이화견직, 경도직물 등 크고 작은 직물공장 60여 개가 들어설 만큼 번창했다. 인조견과 특수면직(광목), 소창, 넥타이류, 커텐 직물 등을 생산했다. 이 무렵 강화는 섬유를 생산하는 대구와 나일론으로 유명한 수원과 더불어 전국 3대 직물도시로 손꼽혔다. 지금의 제일모직이나 선경보다 규모가 컸던 공장이 있었을 만큼 직물산업이 전성기를 만난다.

그러나 강화직물산업은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고 인조직물이 등장해 소비가 줄어들고 값싼 중국산까지 밀어 닥쳐 쇠락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변변한 공장은 은성직물(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삼흥리 1453-1) 정도이고, 나머지는 소규모 가내 공업 형태다.

강화군은 '2018년 올해의 관광도시'를 맞아 강화읍 신문리에 강화소창체험관을 조성, 사라져 가는 소창을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체험관에는 국내자본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조양 방직 사진과 1200명의 직공들이 근무하던 심도직물의 옛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베틀과 무동력직기부터 1800년대의 미싱, 평화직물에서 직조된 직물 등 번성했던 옛 방직산업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24년째 강화도에서 소창 생산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은춘기 은성직물 사장은 "생산품 가격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보니 공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어렵지만 기술력 하나로 버텨 내고 있다"면서 "강화군에서 소창의 옛 명성을 되찾으려면, 강화 지역 소비업체들이 강화 산 소창을 구입할 수 있도록 판로확대는 물론 전통적인 소창생산품을 너머 소비자들이 원하는 다양한 고부가가치의 제품개발을 지원하는 등 정책적 뒷바침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