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화 농협이념중앙교육원교수
모처럼 파란 하늘을 만났다. 지난 주 토요일 온종일 내린 비가 무던히도 우리를 괴롭히는 미세먼지와 황사를 데리고 갔나 보다. 갓 새순이 돋고 있는 나무들도 가느다란 줄기 끝까지 물이 올라 힘찬 생명의 기운을 눈으로 전해준다. 맑고 시원한 공기를 오랜만에 폐 속 가득 담아본다. 물기 머금은 산 흙의 싱그러운 내음이 숲 가득한 생명력과 함께 몸을 감싸는 듯하다.

상록수 사이 높은 곳에서 아직 한 두 송이 꽃이 남은 벚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벚나무 옆 비쭉하게 키만 자란 나무가 '나 목련이요' 하듯이 목련꽃 서너 송이를 달고 있고, 그 아래 작은 잡목과 이름 모를 풀들이 큰 나무와 함께 숲을 이루고 있었다. 새 식구 맞을 준비에 오색딱구리는 나무를 열심히 쪼아대고, 청설모는 보금자리를 손질하는 듯 위아래로 분주하다. 다양한 생명이 함께 봄을 살고 있는 모습이 내게 또 하나의 소확행(小確幸)을 선물한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다양성을 없애는 일이 때로는 목숨을 앗아갈 만큼 큰 불행을 초래하기도 한다. 100만명에 이르는 아일랜드인이 굶주림에 희생되었던 1840년대 대기근은 감자역병 때문이었다. 감자에 대한 식량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던 아일랜드에서 재배되던 감자는 단일 품종이었기에 역병은 급속하게 번지게 된 것이다. 한때 바나나계를 호령하던 그로미셸 품종이 파나마병으로 결국 식탁에서 사라지고 현재 우리는 이를 대체하는 신품종(캐번디시) 바나나를 먹고 있다. 그런데 이 또한 변종 파나마병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1980년대 대만에서 처음 발견되기 시작한 새로운 파나마병은 중국과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넘어, 중동과 아프리카까지 확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전문가들은 5∼10년 후에는 바나나가 멸종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MeToo)운동이 우리나라에도 한창이다. 법조계, 연극영화계, 정치계, 연예계, 교육계에 이르기까지 잘못된 관습과 기울어진 권력 때문에 말하지 못하고 혼자만 아파하던 사건들이 둑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다른 한편에선 남성들이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겠다는 '펜스룰(Pence rule)'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농담처럼 '여직원들하고는 회식하면 안 되겠어'라고 말하지만 웃음 속에 불편한 진심이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극단적 편가름이 사회 문제인 우리나라에서 또 다른 편가름으로 굳어질까 걱정된다. 잊으면 안 되는 것은 미투운동의 본질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권력관계 속에서 개인의 인권이 부당하게 침해받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지위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함께 어울려서 살자는 운동이다.
키 크고 푸른 전나무만 사는 숲이 아니라 벚나무와 목련, 그리고 키 작은 나무들과 딱따구리, 청설모가 함께 어울려 건강한 삶터를 제공하는 자연 그대로의 숲처럼 말이다. 사회도 대기도 오늘처럼 늘 청명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