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 인천대 소비자아동학과 교수
공식 인정 사망자 925명, 총 피해자 3995명, 피해 인정을 위한 신청자 포함 총 피해자 5995명, 6세 이하 어린이 사망자 210명, 태아의 사산 및 유산건수 11건…. 기도손상, 호흡곤란, 급속한 폐 손상으로 인한 폐의 섬유화, 결국엔 사망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중증피해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치료비는 매달 350만원 상당, 폐이식을 위한 수술비는 2억원 가량, 그러나 산술적 계산으로는 그 피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평생의 고통인 산소발생기를 끼고 살아야 하는 불편함과 피해가족의 병수발로 인해 빚더미에 내몰려 겪게 되는 다른 가족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심리적 고통까지….

앞서 열거한 숫자나 사례가 나와는 무관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들 피해자들은 사용하던 가습기의 위생관리를 위해 1997년 출시된 가습기 살균제를 일상적으로 구매했던 평범한 소비자였다. 1997년 평범했던 그 소비자들이 2018년 현재 가습기 살균제 피해 대상자로, 혹은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로 바꿔 불리면서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점차 멀어져 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너무도 위험한 사실 한 가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친숙한 브랜드의 그 기업을, 그리고 시장과 정부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어이없게도 바로 피해자들이 해당 제품에 표시된 '살균'이나 '항균'의 뜻을 누구도 해석할 수 없지만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살생 가능성' 혹은 '유독성으로 인한 유병발생 가능성'으로 유추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사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지난 주 제1차 가습기 살균제사건 진상규명 소위원회가 열렸다. 주요 고발 대상을 누락하여 표시광고법 위반 혐의로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를 늑장 고발하였으나 공소시효 만료 판결을 받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작년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와 여론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배상규정을 마련하여 조속히 협상을 마무리지으려는 해당 업체의 입장 사이에 피해자들의 간절함이 또 다시 외면당하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우려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사건인지 이후 7년의 시간동안 힘들게 생활했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어렵사리 통과한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을 통해 고통의 시간과 정도가 등급화되어 급간으로 매겨져 또 다시 상처를 받는 것은 아닐지, 그 평범한 소비자들의 어이없는 피해가 더 많은 배상액을 요구하기 위한 주장으로 읽히는 것은 아닐지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든다.

시장에서 제공되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에는 어쩌면 당연스럽게 위험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소비자들의 부주의나 제품의 오남용에서 오는 위험을 방지하고, 안전에 문제가 있는 제품을 차단하기 위해 설계·생산·표시 상에서 발생하는 결함을 통제하기 위한 다양한 소비자안전 관련 법 제도가 구축되어 운영된다.

가습기살균제 사태 역시 살균제 표시내용이 진실하지 못했으며, 소비자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표시정보인 안전성이 제대로 제품에 제시되어 있지 않아 소비자가 위험성을 쉽게 인지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소비자안전 문제 발생 요인을 명백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품의 특성, 사용방법, 주의사항 등 표시사항이 빠져 있거나 불충분하여 소비자가 위해를 입거나 입을 우려가 있는 경우에 관련 업체는 경고, 표시 및 유통 상 결함을 인정해야 하며 이를 정당하게 보상하고 책임지려는 자세가 요구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소비자안전을 위협하거나 공정한 거래질서를 위반하는 거래 당사자를 규제하기 위한 역할을 수행하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관리감독 중요성이 다시 상기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과 2016년의 가습기 살균제 사태 관련 업체 대상 무혐의 및 심의절차 종료 등 일련의 사회적 요구와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한 심의 절차와 내용의 적절성에 대한 대내외적 비판과 평가에 다시 귀를 기울이길 권하고 싶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행사할 때 국가는 개별 국민이 보유하고 있는 이러한 신성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는 당연지사(當然之事)한 이야기가 오히려 현실물정을 모르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누군가는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라고 했다. 가습기살균제 사태 역시 우리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인 정의를 기준으로 피해자들이 마땅히 치유될 수 있는 방향으로 해결되는 것이 당연히 맞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