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강도시기 고려유물 <하>
▲ 635년 창건한 보문사는 '팔만대장경' 인본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됨으로써 팔만대장경 불사에 적극 참여한 사찰로 알려지게 됐다. 봄을 맞은 보문사의 4월이 초파일 준비로 분주해 보인다.
▲ 보문사로 향하는 길.
▲ 낙가산 눈썹바위 아래 마애석불좌상.
꽃잎들이 흩날렸다. 오백나한상 위로, 커다란 와불이 누워있는 법당의 지붕 위로도 함박눈송이 같은 꽃눈들이 떨어져 내렸다. 낙가산(洛迦山) 눈썹바위 아래 마애관음좌상의 미소는 봄햇살을 닮아가고 있었다.

대웅보전 앞마당은 온통 연등의 바다. 형형색색 연등의 물결 위로 카키빛 바다가 출렁거렸다. 바다 위로 둥둥 떠다니는 봄햇살의 조각들에 눈이 감겼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봄은 그렇듯 눈부신 빛깔로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강화 석모도의 '보문사'에서 '팔만대장경'의 흔적을 발견한 때는 지난 2015년이다. 당시 오용섭 인천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동문선>(東文選)과 중국 <사고전서>(四庫全書)에서 팔만대장경 판각과 보관의 총 본산이 강화도라는 사실을 찾아냈다. 진주 용봉산 영암사를 중창한 뒤 누락된 대장경을 보충하기 위해 강화도에 있는 대장경으로 보충했다, 팔만대장경 인본을 강화 삼산면 석모도 보문사에 보관했다는 <동문선>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와 <사고전서>의 '고려국대장이안기'의 내용을 보여줬다. 오 교수가 밝혀낸 사료들은 팔만대장경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보관했었다는 피하지 못 할 증거였다.

팔만대장경 말고도, 강화도는 인류의 문명을 혁명적으로 앞당긴 인쇄술이 세계 최초로 시작된 곳이다. 흔히 인쇄술과 동의어인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42행성서>(1450)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200여년 앞선 1234년 강화도에선 <상정고금예문>이 나왔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펴낸 책이다. 고려는 몽골과의 항전을 위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2년 뒤에 <상정고금예문>을 찍어낸다. 고금의 예의를 수집하고 고증해 50권으로 엮은 전례서였다. 이 책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만 기록돼 있을 뿐 아직까지 원본은 발견하지 못 한 상태다.

1236년 고려는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인 <향약구급방>을 펴낸다. 누가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책은 향약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향약은 고려,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약재를 가리킨다. 당시 중국에서 수입하는 약은 당재(唐材)라 불렀는데 <향약구급방>이 나온 이유는 외국산 약재들을 우리나라 약재로 대체하기 위함이었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약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성과도 거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책의 발간 이후 고려 국왕의 수명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이다. 고려 초기 국왕의 평균수명은 42.3세였으나 후대에 갈수록 수명이 늘어난다. 무신정권기(1170~1270)를 기준으로 볼 때, 고려 국왕의 평균수명은 전과 후가 39.3세와 49.79세로 각각 10년 정도 차이가 나타난다. <향약구급방>은 또한 급성 질병에 대해 백성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로 치료하는 방법을 쉬운 말로 표기했다는 점에서 13세기 국어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기도 하다.

고려는 이어 1239년 역시 금속활자로 찍어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펴낸다. '증도가자'란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이었다.

금속활자보다 먼저 나온 것이 목판인쇄술이다. 강화의 고려정부는 1236년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술인 '팔만대장경' 판각을 시작해 1251년 8만여 장의 대장경을 완성한다. 팔만대장경은 강화도의 '대장도감'에 판각을 지휘했으며 완성된 이후 1398년까지 강화도 '대장경판당'에 보관했다. 보문사에 팔만대장경 인본 3질이 보관돼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대장경판당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대장경판당이 어디였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사>는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보관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서문이 내성 서문을 말하는 것인지, 중성 서문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밝혀진 게 없다. 현재까지는 국화리 어디쯤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용장사'라는 추정도 있다. 팔만대장경 미스테리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시급한 이유이다.

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장(經藏), 그것을 해설하고 내용을 보완한 논장(論藏), 수행자의 계율을 담은 율장(律藏)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팔만대장경의 위대성은 불교와 관련된 경전을 전부 모은 불교지식의 총체에 인쇄술이라는 하이테크가 결합했다는 사실에 있다. 박종기 국민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강도 시기 고려 인쇄술은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었다"며 "대장경을 '5000만 자의 하이테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불교 지식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쇄술이라는 최첨단 기술이 결합됐기에 대장경은 완성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스마트폰처럼 인문정신과 첨단기술의 결합이 바로 대장경의 완성이었다는 얘기다. 인터넷에 앞선 제1의 정보혁명이 바로 인쇄술이고, 인쇄술을 주도한 '인쇄술의 성지'가 바로 강화도였던 것이다.

보문사를 빠져나 오는데 차창 위로 꽃잎이 떨어져 앉았다. 봄바람에 날리는 저 연분홍 꽃잎들은 혹시 고려인들의 영혼이 아닐까.

/글·사진 김진국 논설위원 freebird@incheonilbo.com


[석모도 100% 즐기기]서해 3대 낙조 속 노천욕 최고 석모대교로 가는 길도 편해져
보문사·마애석불좌상 찾아 정신수양
미네랄 온천·꽃게탕 맛집서 원기회복

강화도 서쪽 석모도에 자리한 보문사(인천시 강화군 삼산면 삼산남로 828번길 44, 032-933-8271~3)는 양양 낙산사, 금산 보리암과 함께 3대 해상 관음기도 도량으로 꼽히는 사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4년(635)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중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강화도로 내려와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 곳엔 마애석불좌상은 물론, 나한상을 모신 석실, 700년 수령의 향나무, 300여명의 승려와 수도사를 먹이던 맷돌 등이 있다. 전등사와 마찬가지로 보문사에도 고려왕실의 왕후가 헌정한 옥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보문사 법당 뒷쪽으로 층계를 따라 올라가면 '마애관음좌상'을 만난다. 눈썹바위 밑에 돌로 새긴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당시 보문사 주지 배선주 스님이 금강산 표훈사 이화응 선사와 함께 새긴 좌불상이다. 그냥 봐서는 그리 크게 보이지 않지만 높이 920㎝, 너비 330㎝나 되는 거상이다.

보문사를 내려오면 '미네랄 온천'(032-930-3806)을 만난다. 지하 460m 화강암에서 솟아오르는 51도의 온수로, 칼슘과 칼륨·마그네슘·염화나트륨 등이 풍부해 한국온천협회로부터 국내 최고의 온천수로 평가받았다. 실내탕과 노천탕, 황토찜질방, 옥상 전망대, 족욕탕 등을 갖추고 있으며 지열과 태양광 등 친환경에너지로 운영된다. 석모도는 서해 3대 낙조 중 하나로 손꼽는 곳이다. 바닷가와 가깝고 한 번에 2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노천탕은 목욕과 함께 서해의 석양을 감상할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실내탕에 들어갈 때에는 온천수 특성상 비누와 샴푸 등의 세제는 쓸 수 없다. 개인 수건을 챙겨야 하며 입장료는 성인 9000원, 소인 6000원이다. 오전 10시~오후 5시. 족욕체험장도 마련돼 있다.

보문사를 찾는 사람들이 무심코 들어가는 식당이 보문사 입구 '전망좋은 집'(032-932-3137)이다. 기름진 석모도 쌀밥과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꽃게탕이다. 여기에 벤댕이회무침과 구이, 해물파전, 게장정식, 산채비빔밥도 맛이 뛰어나다.

그 전까진 배를 타고 오갔으나 '외포리~석모도'를 잇는 석모대교가 지난해 6월 개통한 뒤 주말이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왕수봉 기자 8989king@incheonilbo.com

인천일보·강화군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