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호 편집국 부국장. 정경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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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우리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간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강도(强盜)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강도 일본이 헌병·경찰정치를 여행하여 우리 민족이 촌보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회한이 있으면 벙어리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 영지라고 일본놈들이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를 찬미하는 반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다."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조선혁명선언' 또는 '의열단선언'의 일부분이다. 이 선언은 일본을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박탈한 강도로 규정한다.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 정당한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3·1운동 이후 대두된 자치론, 내정독립론, 참정론 및 문화운동을 일제와 타협하려는 '적'으로 규정했다. 특히 외교론, 독립전쟁 준비론 등의 타협적 운동방향을 비판하고 있다. 6400여자로 쓰인 이 선언문은 민족주의 이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선언문 작성계기가 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김원봉 등 독립투사 13명으로 조직됐다. 의열단은 이듬해부터 곧바로 큰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의열단은 밀양·진영 폭탄반입사건,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1920년), 조선총독부 투탄의거(1921년), 상해 포탄의거(1922년),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효제동 의거(1923년), 동경 니주바시 폭탄투척의거(1924년), 동양척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의거(1926년) 등을 펼쳤다.

이론과 체제정비를 위해 당시 의열단장 김원봉(1938년 조선의용대장) 장군은 1922년말 신채호 선생에게 의열단 선언문을 청하였다. 당시 신채호 선생은 신민회 활동중 1910년 4월 망명길에 올라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관여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사임했다.이후에는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글을 써 왔다.

다음은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의 '조선독립의 서' 일부분이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18세기 이후 국가주의는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제국주의가 대두되고 그 수단인 군국주의를 낳음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우승 열패·약육 강식의 이론이 만고불변의 진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만해는 1919년 3·1운동 이후 투옥되어 옥중에서 검사 심문에 답하기 위해 이 문장을 작성했다. 조리 있고 해박한 이론, 정연한 논리, 시대와 민족을 초월한 탁월한 사상과 당시 세계정세를 꿰뚫어 보고 있다. 이 글은 비밀리에 바깥으로 흘러나와 1919년 11월 4일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 제25호 부록에 실렸다. '조선 독립의 서'는 5장으로 이뤄져 있다. 우선 1장 개론에서는 자유와 평화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우주 행복의 근원인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2장에서는 민족자결 조건을 말하면서 조선독립 선언의 동기를 설명했고, 3장에서는 민족 자존성, 조국 사상, 자유주의, 세계에 대한 의무를 밝히고 있다. 4장에서는 종교와 교육의 자유마저 박탈하는 조선총독 정책을 비판하고 있고, 5장에서는 세계평화와 조선 독립의 자신감을 강조했다.

이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 단재와 만해의 염원은 이뤄졌을까. 친일반역자들에 대한 청산은 어디까지 이뤄졌을까. 패망한 독일에서와 달리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경찰을 대부분 재배치했다. 또한 이승만도 그랬고, 박정희는 자신이 친일파로 일제 만주군관이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25년이 지났으나, 친일청산은 아직 멀었다. '건국절 논란'과 '역사교과서' 파동은 친일·독재세력과 항일·민주화 세력의 대결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하늘에서 단재와 만해 선생께서 땅을 치고 통곡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