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강도시기 고려유물 <상>
▲ 고려왕조는 강화도로 천도한 1232~1270년 봉은사지 오층석탑(위), 강화동종(아래)을 포함해 눈부신 문화유산을 남긴다. 현재까지 문화재로 지정된 강화도의 고려유물은 26개이다.
▲ 고려 23대왕으로 46년간 최장수 재위한 고종의 무덤인 홍릉.
왕릉·금속공예… 문화재 지정 26개
팔만대장경도 16년간 강화서 판각
39년 짧은기간에 눈부신 유산 남겨


강화는 지금 분홍빛의 물결로 출렁이는 중이다. 고려산을 흠뻑 물들인 진달래꽃들은 오는 14일부터 더욱 만개해 관광객들을 맞을 것이다. 22일까지 9일간 열리는 '고려산 진달래축제'에선 해발 436m의 산 정상과 비탈 등 10만㎡에 피어난 진달래꽃길을 따라 거닐 수 있는 행복을 맛 볼 수 있다.

미세먼지가 물러가고 모처럼 하늘이 맑게 갠 날, 봉천산 산비탈을 오른다.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 193. '봉은사지 오층석탑'은 차 두 세대를 댈 수 있는 주차장 바로 위에 서 있었다. '보물 제10호'인 오층석탑은 여느 탑과는 달리 탑 끝이 뾰족하지 않고 3개의 옥개석을 겹쳐 놓은 모습이다. 날개 부분이 깨진 것은 3~5개의 탑신과 5층의 옥개석, 상륜부 등이 유실됐기 때문이다. 발견 당시 이 탑은 넘어져 있었는데 1960년에 보수하면서 다시 쌓아 세웠다.

'봉은사'(奉恩寺)는 개경(개성)에 있던 국찰이다. <고려사>는 고려 덕종 원년(1032)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해 도량을 연 것을 시작으로 고려 전 시기 동안 역대 왕들이 200여차례나 봉은사에 행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강화로 천도할 당시 봉은사도 함께 옮겨왔으며 고종(1192~1259)과 원종(1219~1274)이 자주 발걸음을 했다고 전한다. 강화도에 개경의 궁궐을 똑같이 지은 것처럼 봉은사 역시 같은 규모로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왕조가 몽골의 침입에 맞서 싸우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1232~1270년 고려는 봉은사지 오층석탑을 포함해 눈부신 문화유산을 남긴다. 39년이란 짧은 시간, 그것도 전시(戰時)에 인류문화사에 길이 남을 세계적 문화유산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려가 상당한 문명국가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강화도의 고려 유물로는 우선 왕릉을 꼽을 수 있다. 1213년부터 1259년까지 고려 제 23대 왕으로 무려 46년간 재위한 고종임금의 무덤인 홍릉을 비롯해, 고려 21대왕 희종의 무덤인 석릉, 고려 24대왕인 원종의 부인이자 충렬왕의 어머니인 '순경태후'의 무덤 가릉, 고려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가 묻혀 있는 곤릉 등이 그것이다. 양도면 능내리 석실고분과 하점면 창후리 고분도 있다.

고려시대의 금속공예는 범종, 향로, 반자, 정병, 금강령, 금강저, 금동탑, 경통 등 금동제 불구류를 잘 알려졌는데 대몽항쟁 시기의 기년명 불구류는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다.

강도시기 고려불화인 '오백나한도'는 현재 10점이 남아 있다. 오백나한도의 화기(畵記)에는 "린병(隣兵·몽골병)을 빨리 멸하게 하시고" "국가가 평안하게 하시고" "임금님께서 만수무강토록 하여 주시길" 등 나라와 국왕을 위한 기원이 적혀 있다. 자연이나 일상에서 그려진 나한은 고뇌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마치 몽골군을 물리치려 몸부림치는 고려 군신, 백성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강화도 나들길을 걷다보면 고려왕궁을 둘러싼 성곽들이 만난다. 고종 24년(1237)에 쌓은 강화외성 24㎞ 구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고종 37년(1250)에 왕성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중성 유적이 창리와 옥림리에서 발굴된 바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을 '강화경판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하는 것은 팔만대장경을 16년 간 강화도에서 판각했기 때문이다. 강도시기 팔만대장경 판각을 총지휘하는 본부격인 '대장도감'이 강화도에 있었으며 팔만대장경 제작 뒤 이를 150년간 보관한 '대장경판당' 또한 강화도에 있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어느 장소에 있었는지 비정하지 못 했다. 대장도감의 경우 선원사지나 충렬사에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대장경판당은 기록에 '서문 밖'에 있었다고 남아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 했다.

팔만대장경과 관련해선 강화에서 합천으로 이운한 정확한 이유와 이운 경로를 찾는 것도 사학계가 나서야 할 사안이다. 이와 함께 최우나 최항과 같은 고려시대 실권자들의 무덤을 찾아내는 것 또한 고려건국 1100주년을 맞은 고도(古都) 강화와 인천시가 해야 할 과제이다.

/글·사진 김진국 논설위원 freebird@incheonilbo.com


[강화도 묘 이야기]

일제강점기 군신 묘지석·보물 상당수 유출
고려시대 최고의 청자도 최항 무덤서 도굴


강화도에 있는 고려시대 지정문화재는 26개에 이른다. 국가지정문화재 13개, 인천시지정문화재 9개, 강화군지정문화재가 4개다.

'보물'로 지정된 것은 장정리 오층석탑, 전등사 철종,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백련사 철조아미타여래좌상, 청련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이다. 강화산성, 고려궁지, 홍릉, 석릉, 가릉, 곤릉, 강화외성, 선원사지는 '사적'으로 지정했다.

인천시는 연미정을 유형문화재로 지정했으며 이규보 묘, 봉천대, 천제암(궁)지, 허유전 묘, 인산리 석실분, 능내리 석실분은 기념물로, 원층사지와 김취려묘는 문화재자료로 각각 지정했다. 강화군이 지정한 문화재는 강화중성, 정족산 가궐지, 고려 이궁지, 봉가지 등이다. 강화도엔 이들 지정문화재 말고도 상당한 유물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 나라의 왕조가 39년간 수도로 삼고 국가를 운영했던 곳이라며 모든 문화와 문명이 집중됐을 것이다.

고려청자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국내에서 출토한 고려청자의 상당수가 강화도에서 도굴된 것이다. 현존하는 고려청자 가운데 가장 백미로 꼽히는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국보 제133호) 역시 강화도 진강산 서록 최항의 무덤에서 도굴돼 일본 경매에 나온 것을 삼성가에서 사온 것이다. 국보 173호 '청자철재퇴화점문나한좌상'도 1950년대 강화읍 국화리에서 도굴된 것이다.

강화도는 일제강점기때부터 1960년대까지 왕릉을 비롯한 고려군신들의 묘가 마구 도굴되면서 상당수 보물들이 일본과 같은 외지로 유출됐다. 청자는 물론 묘지석까지 가져갔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묘지석만 해도 최항, 김취려, 유경현, 한광연, 김중문, 이규보, 김중구 등 강도시기 명신들의 묘지석이 여러 개에 이른다.

/왕수봉 기자 8989king@incheonilbo.com

인천일보·강화군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