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석 경기본사 사회부장
정재석.jpg
1960년 4월 마산의 하늘은 온통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시민들은 온몸으로 저항했다.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부정선거로 시민들이 숨지고 시가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4월11일 정오 무렵 마산 합포만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오른쪽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3·15부정선거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김주열(17)군이었다. 이 끔찍한 사건은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도화선이었다. 27년이 흐른 1987년 6월9일. '6·10대회를 위한 범연세인총궐기대회'를 하루 앞두고 연세대학교 이한열(22)씨가 최루탄에 머리 뒤쪽을 직격으로 맞고 숨졌다. 6·29 항쟁의 뇌관을 터뜨렸다.

이 두 발의 최루탄은 민주주의를 찾겠다는, 그 지난했던 독재시절의 쓰라린 역정을 상징하는 '눈물탄'이었다.
군사정권을 몰아내자는 항쟁의 불길이 거세게 불던 1987년 6월18일. 부산과 서울을 비롯한 전국 16개 지역에서 50만여명이 거리로 나왔다. 이날 집회의 목적은 '호헌철폐·독재타도'가 아닌 최루탄 추방대회였다. 9일전 이한열 열사를 비롯해 피해자가 속출하자, 최루탄을 쏘지 말라고 경찰과 정부에 호소한 것이었다. 그런데 또 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경찰이 부산 동구 좌천동 자성교 위에 밀집해 있던 시위대를 향해 쏜 직격 최루탄에 이태춘씨가 머리를 맞은 뒤 고가다리에서 떨어져 숨진 것이었다.
60~80년대 우리의 '흑역사'가 지금 세계 곳곳에서 데자뷔된다.

1975년부터 최루탄 국내 생산을 시작한 우리 정부는 형제국가 할 것 없이 최루탄을 악명과 함께 수출하고 있다. 터키·바레인 등 10여 개국에 연 1000억원 넘는 규모다. 2013년부터 2015년 8월까지 수출된 최루탄의 양은 약 500만발에 달한다. 최루탄은 군사 전략물자에 해당돼 수출을 금지하고 있지만 내부 치안, 시위 진압, 질서 유지 목적이면 정부와 경찰의 허가를 받아 수출할 수 있다. 한국은 터키의 최대 최루탄 공급국이다. 빵을 사러 나섰다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베르킨 엘반(14)의 사례를 비롯해 터키에서 2014년에만 최소 8명이 사망하고 453명이 다쳤다. 그해에만 무려 224일 동안 최루탄이 사용됐다.

인구 120만명에 불과한 바레인은 2011~2012년 무려 150만발의 한국산 최루탄을 수입했다. 그 기간 39명의 사망자를 냈다. 199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비슷한 사태가 일어났다. 바레인과 터키 시민단체는 2014년과 2015년 각각 우리 정부에 최루탄 수출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국제앰네스티 등 다수의 국제인권단체들은 물론 유럽인권재판소도 최루탄 사용에 따른 인권침해를 지적했다. 참여연대 등 국내 시민단체들도 대(對)터키 최루탄 수출을 허가하지 말 것을 정부에 지속해서 요구하고 있다.

지금, 경찰이 최루탄 폐기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 1998년 '최루탄 무사용 선언' 이후 20년 만이다. 이를 반겨야할지, 당연하게 여겨야 할지 분간하기 어렵다. 경찰청은 경기남부청을 시작으로 오는 10월까지 최소 필요량만 남기고 전국에 보관된 최루탄을 폐기한다고 밝혔다. 경기남부경찰청이 며칠 전 약 3만5000발을 폐기했다. 경기남부경찰청은 25개 기동부대와 규모가 큰 20개 경찰서에 총 1만2000발을 남겼다고 한다. 1만2000발이 조금이라면서, 기동부대 운영 지침을 따랐다는 근거를 댔다.

그런데, '최루탄 무사용 선언'을 하고서도 최소 필요량은 무언가. 또 운영 지침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항변인가. 경찰의 앞뒤 다른 변명을 듣노라면, 아직도 '최루탄 사용'에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닌지 싶다. 미련이 아니라면, 숱하게 쓰러진 학생과 시민의 모습을 보고서도 최루탄 완전 폐기가 두려운 것은 무엇 때문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와 경찰은 '인권침해'와 '독재의 상징'인 최루탄 전량을 폐기해야 한다. 또 "제발 최루탄 수출을 중단시켜 주십시오"라는 터키국민의 호소를 귀담아 하루빨리 인권 후진국 오명(汚名)을 벗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