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조용필은 00다'라고 할 때 어떤 말이 가장 어울릴까. 그간에는 '가왕(歌王)', '전설', '20세기 최고의 가수' 등이 그 자리를 메워왔다. 그러나 어딘가 좀 부족한 느낌이다. 그 조용필이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데뷔 50주년 기념 콘서트 입장권 4만매가 20분만에 매진됐다고 한다. 내달 초에는 13년만에 평양 무대에도 선다. 내달 하순부터는 '불후의 명곡(KBS)'이 '조용필 전설편'으로 3주 연속 특별 편성된다고 한다.
▶여기서 그를 새삼 소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말 그대로 '국민 가수'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가 세운 진기록과 노래들을 되짚어 보는 게 나을 성 싶다. 1979년 발표된 정규 1집 음반은 한국 첫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당시 다방이든 소리사든 '창밖의 여자', '돌아와요 부산항', '한오백년', '슬픈 미소' 일색이었다. 1994년에는 한국 최초로 음반 판매량 1000만장을 기록한다. 조용필 덕분에 우리 가요 음반 판매량이 외국 음반 판매량을 처음으로 앞지른 것이다. 젊은 여성팬층의 '오빠부대'는 당시 TV 저녁 뉴스의 헤드라인을 타기도 했다. 그가 '기도하는(비련)'이라고 운을 떼면 객석에서는 조건반사처럼 '꺅∼오빠∼'가 터져 나왔다. 상이란 상은 휩쓸다보니 1986년에는 연말 '가수왕'을 사양하는 선언까지 했다. 한국 가수의 첫 카네기홀 공연도 그였다.
▶중장년 이상이면 그의 노래와 얽힌 추억 한둘쯤 있게 마련이다. 사랑도 이별도 인생의 쓴 맛까지도. 그와 더불어 청춘의 터널을 지나왔던 시절이다. 불현듯 늦은 밤 맥주홀에서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허공)'을 떼창하던 이들이 눈에 선하다. 해양대학을 나와 마도로스로 떠돌던 친구는 '꽃피는 동백섬에…(돌아와요 부산항)'를 부르다 울먹였다. 기자도 20여년전 유럽연수 때 조용필 음반으로 향수를 달랬던가. 그는 예인(藝人)답게 말술이었다고 한다. 여성지 연예부의 민완기자이던 한 선배는 그와 술을 마신 뒷날이면 나를 불러냈다. 그는 술집도 포장마차 같은 곳을 즐겨 찾으며 동이 트도록 잔을 놓지 않았다든가.
▶개인적으로는 양인자 선생이 노랫말을 쓴 곡들을 좋아한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바람이 전하는 말' 등이다. 그도 우리도 어느 날엔가는 바람처럼 떠나겠지만 젊은 날 그의 노래는 오래도록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바람이 전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