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강의를 듣는 중국 유학생의 출신 성(省)을 물으면 산둥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인천대 중국 유학생만 놓고 보면 전체의 7~8할은 산둥성 출신이 차지한다. 타 도시 소재 대학도 사정은 비슷할 터이다. 한국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 가운데 약 20%는 산둥성에서 오고 있다. 식당에서 먹는 수입 김치는 산둥성의 김치공장에서 제조된 것이며, 각종 채소를 비롯한 수입 농산물의 원산지도 산둥성이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낙지와 해삼을 비롯한 산둥성산 어산물이 많이 수입되고 있다. 매년 꽃게 철이면 우리 해역에 나타나 불법어로를 하는 어선도 대부분 산둥성 어항에서 출항한다. 중국의 성 가운데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도 산둥성이다. 웨이하이(威海)에는 4만~5만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고, 옌타이(煙台)에도 그와 비슷한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기업 가운데 가장 많이 자리한 곳도 산둥성이고, 옌타이에만 2천~3천개 한인 기업이 있다.

산둥성은 중국의 성 가운데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그룹에 속하기 때문에 한국의 투자가 산둥성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산둥성은 중국의 22개 성 가운데 하나이지만 하나의 국가나 다름없다. 면적은 한반도와 거의 비슷하고 인구는 한국의 약 2배나 된다. 경제규모는 한국 GDP의 70% 수준에 육박하며, 산둥성의 1인당 소득은 1만달러를 넘어 중국의 성 가운데 소득수준이 높은 편에 속한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산둥성은 농업과 어업이 발달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산둥성은 중국 채소 생산의 6할을 차지하는 세계 3대 채소 생산지이다. 황해, 발해, 동중국해에 면한 광활한 어장을 보유하여 중국 내 최대 어업산지이다. 이러한 농어업 발달이 한국의 농산물과 수산물 시장에 영향을 주고 있다. 최근에는 각종 제조업이 발달하여 농업, 어업, 공업이 균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산둥성은 유교의 발상지로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강태공이 시조인 제나라, 공자가 태어나 활동한 노나라가 현 산둥성과 거의 같은 영역이다. 그래서 산둥성의 별칭으로 치루(齊魯)라는 말을 사용한다. 오래된 전통과 문화를 간직하여 자기 고장에 대한 산둥사람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중국의 유명한 비밀결사와 민간신앙의 발상지로, 불의에 항거하는 산둥사람이 중국의 역사를 바꾼 게 한 두 번 아니었다. 산동사람의 교육열도 높다. 해외 학회에 가보면 산둥성 출신 중국인 학자를 많이 접한다. 중국 대학입시인 가오카오(高考)에서 산둥성 학생의 평균 점수가 타 성보다 훨씬 높다. 산동의 대학에 유학을 간 한국학생은 이구동성으로 "공부 정말 열심히 한다"며 감탄하고 돌아온다.

산둥성은 중국 4대 요리 중 하나인 북경요리의 발상지이다. 청나라 황실의 궁중요리사 상당수가 산둥성 출신이었다. 청나라 멸망 후 산둥성 출신 궁중요리사가 북경에 고급 중화요리점을 개업한 것을 계기로 북경의 전통 식당은 대부분 산동사람이 경영하게 된다. 수타면도 산둥성에서 시작됐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자장면도 산둥성에서 유래한 음식이다.
산둥성은 한국화교의 고향이다. 근대 한반도에 이주한 화교 가운데 8할 이상은 산둥성 출신이었다. 요즘은 한국이 산둥성에 투자를 하지만 근대만 해도 산동의 상업자본이 인천을 비롯한 전국에 투자를 했다. 당시 인천차이나타운에는 옌타이의 상업자본이 세운 포목상점, 중화요리점, 잡화상점이 즐비했다. 채소 재배 기술이 뛰어난 산동 화교는 인천의 상업용 채소시장을 거의 독점했었다. 인천을 대표하는 중화요리점이던 공화춘, 중화루도 산동 화교에서 경영하던 중화요리점이다.

근대 한국인도 산동에 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목사가 산둥성에 교회를 세워 중국인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한반도가 정치적으로 불안할 때 산둥성은 군대 파견의 땅이기도 했다. 백제를 물리치기 위해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군대가 출발한 곳이 산둥성이며,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오장경의 군대가 출발한 곳도 산둥성이었다.
이러한 산둥성이지만 산둥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없다. 대 중국 전진기지로 자처하는 인천에 산동연구센터를 세워 산둥성을 종합적으로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