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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개항장 중심은 '내동'<內洞>이다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

2018년 03월 16일 00:05 금요일
역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개항장' 하면 으레 머리에 그려지는 공간이 있다. 중구청 일대 이른바 근대 건축물이 모여 있는 지역이다. 그곳에는 근대를 콘텐츠로 하는 전시관과 가게들이 늘어서 있으며, 개항을 주제로 하는 축제와 행사가 넘쳐난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 의심 없이 그곳을 개항장이라 부른다.
중구청 주변이 관동, 중앙동 등 행정지명 대신 개항장으로 불리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그 일대가 개항장 문화지구로 지정되고 나서가 아닐까 싶다. 개항장 문화지구는 2010년 2월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선정된 문화지구다. 여기에 위치한 문화 시설과 권장 영업 시설은 다양한 세제 혜택과 보조금을 지원받는다. 그 덕분에 중구청 일대는 근대와 개항을 표방하는 각양각색의 시설과 상점이 모여들어 근대 거리로 탈바꿈했고, 아예 개항누리길이라는 이름이 붙어버렸다. 여기서 개항장 문화지구의 범위는 개항기 일본, 청국, 각국 조계 영역이며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개항장 공간과 일치한다.

개항장이란 외국과의 조약에 따라 개방된 항구를 말한다. 그 안에서 외국인은 거주는 물론 토지와 가옥의 소유까지 허용되었다. 개항장 범위는 부두 시설로부터 10리 이내에 해당한다. 특정한 공간을 다른 나라에 조차한 조계지와 외국인, 조선인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잡거지, 즉 조선지계로 구성된다. 조선지계에서 거주가 허용되었던 외국인과 달리 조계지에서 조선인의 거주는 불가능했다. 인천 개항장은 자유공원 남쪽으로 펼쳐진 세 군데의 조계지와 그 동쪽과 북쪽으로 형성된 조선지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개항장문화지구로 지정된 공간은 조선 정부가 외국에 조차한 땅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고, 실제 개항장 범위는 우리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보다 훨씬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개항장을 움직였던 주체도 그간 우리가 알고 있었던 조계지의 외국인이 아니라 조선지계에 살았던 조선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개항장을 향하는 우리의 시선을 조금씩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

고개를 중구청 일대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돌려보자. 중동우체국에서 신포동 금강제화를 지나 성공회 성당이 있는 언덕으로 오르는 길. 이 길이 개항장의 외국 조계지와 조선지계를 나누는 경계다. 해안가 바다와 만나는 곳에 조선인 부두가 있어 한반도 전역에서 배에 실어 온 곡물을 쌓아두고 외국 상인과 흥정하였고, 다른 나라의 물건이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유통될 수 있었다.
조선의 객주 상인들은 지금 신포동에서 싸리재로 이어지는 거리에 가게를 열어 조계지의 외국인과 거래하며 부를 쌓아갔다. 거리 끝에는 우리 상인들의 자금 유통을 위해 민족은행인 대한천일은행의 지점도 개설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조선인들의 우편과 전신업무를 담당했던 우체사, 전신사 등의 관청이 자리했던 곳도 이 거리였다. 위쪽 언덕으로는 개항장의 전반적 행정업무를 관할했던 인천항 감리서가 있었다. 애초에 인천항 출입국 관리업무와 해관(지금의 세관) 관리감독을 위해 설치되었던 감리서는 개항장 관련 업무가 많아지면서 그 기능 또한 세분화되었다. 게다가 인천도호부의 행정업무를 겸하게 되면서 사법, 경찰 업무는 물론 개항장 내 토지 임차와 매매 업무까지 맡아보았다. 감리서 내에는 인천항 외국어학교와 인천부 공립소학교를 두어 조선인 자녀들에게 신문물을 가르치기도 했다.

객주 상점과 천일은행, 우체사와 인천항 감리서가 자리했던 곳, 이곳을 우리는 내동(內洞)이라 부른다. 조선시대 개항장 일대는 대부분 선창리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개항 이후 조계지와 조선지계가 구획되자, 조계지 밖 조선지계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공간이 분화되고 새로운 지명이 생겨났다. 감리서를 두었던 이곳에는 내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이야 도시의 중심인 지역에 중구, 중앙동 등 '중(中)'자를 붙이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한 고을에서 가장 중심이고 번화한 곳에는 읍내리, 부내면 등 '내(內)'자를 주로 붙였다. 그렇게 보자면 공간적으로 개항장의 중앙에 위치하며, 기능적으로도 행정과 상업, 교육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내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이제 중구청이 아닌 내동을 중심으로 개항장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개항장을 움직였던 조선 사람들이 눈에 들어 올 테고, 그들이 열망했던 근대를 향한 꿈을 제대로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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