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경 정경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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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없는 날, 불꽃은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마치 흡수지가 물을 빨듯 꺼멓게 번져가는 잔디 언덕이나, 큰 구렁이가 굼실굼실 기어가듯 타 들어가는 논밭 두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지랑이는 현기증이 나도록 하늘로만 피어올랐다.'
소설가 오영수의 단편소설 요람기에 나오는 '들불'을 표현한 것이다. 이른 봄 또 다른 내일을 약속하기 위해 며칠 밤씩 온 들판을 붉게 물들인다. 지금 '미투(# 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우리 사회에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권력에 의한 성폭행이나 성추행 등의 성폭력 피해사실을 폭로하는 미투는 지난해 10월 미국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제작자 허비 웨인스타인에게 성추행을 당한 여배우들이 하나 둘씩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알리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전세계로 확산됐다.
당시 한국에서도 일부 시인 등 문단 내 성폭력 피해 폭로가 있었지만 공론화하지는 않았다. 피해 사실을 폭로한 여성 일부는 가해자로 지목한 남성에게서 오히려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당해 경찰과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그런던 중 지난 1월 현직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부 통신망 '이프로스'에 8년전 자신의 성추행 피해를 밝히면서 국내 미투 운동에 불을 댕기게 됐다. 서 검사의 고백으로 시작된 미투 운동은 문화예술계와 정치권 등 순식간에 사회 전 영역으로 퍼져 나갔다. 연극연출가 이윤택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발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퍼지면서 '권력에 의한 성폭력' 이 미투 운동과 함께 본격적으로 이슈화하기 시작했다. 시인 고은, 극작가 오태석, 배우 조민기, 배우 조재현, 배우 오달수 등 문화예술계 최정상급 위치에 있는 인사들의 성폭력 의혹이 속속 폭로됐다.
미투 운동이 사회 전반에 들불처럼 번지자 마침내 문재인 대통령도 지지를 선언하며 대책을 내놨다. 지난달 26일 문 대통령은 "미투 운동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피해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피해자들의 폭로가 있는 경우 형사고소 의사를 확인하고 친고죄가 폐지된 2013년 6월 이후 사건은 고소 없이도 적극 수사할 것"을 지시했다. 정부는 분야별 신고상담센터 운영 계획을 밝혔다.


지난 2일에는 미투 운동 확산 후 처음으로 조증윤(50) 극단 대표가 구속됐다. 조 대표는 2007년부터 2012년 사이 이 극단에서 단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미성년자 여성 2명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 주에는 미투 운동이 정치권을 강타했다.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인 안희정 전 충남 도지사가 여비서를 성폭행했다는 폭로가 나오면서 대권 가도에서 추락했다. 더불어민주당의 민병두 의원은 미투폭로가 나오자 의원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현 정권 들어 첫 선거로 향후 정국 풍향을 가늠할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은 '미투 태풍'이 어디까지 불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잇단 미투 태풍에 휘청이고 있는 민주당은 이번 지방선거부터 후보자들의 성 범죄와 관련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자유한국당 역시 아동폭력·여성폭력·성폭력 경력자에 대한 검증을 통해 공천 대상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등 당 공천 후보와 관련된 미투 폭로는 절대 없도록 하겠다는 방침이다. 바른미래당도 성 범죄 연루자를 공천 심사 단계에서 배제하겠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법원 판결 아닌 검찰 기소 단계에서부터 공천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 의혹만 제기해도 심층 심사를 통해 공천 여부를 가릴 계획이다.

이렇듯 미투 운동은 이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회 지도자 자질을 검증하는 역할까지 하게 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미 사회변혁의 '미투 운동'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타고 있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인 미투 운동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경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