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선 前인천시장의 발자취
▲ 1998년 9월 18일 송도신도시를 방문한 최기선 전 인천시장과 관계자들이 지도를 보고 있다. /사진제공=인천시청·인천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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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前대통령 신민당총재 시절 비서관으로 정계 입문
1984년 민주화추진협 대변인 통해 반독재 투쟁의길 걸어
1993년 제7대 시장으로 부임하며 인천서 정치 인생 받쳐
송도 신도시·국제공항 등 발전 전략 통해 지역 성장 도모



"군사독재의 상징물 중 하나인 바리케이트를 시청 정문과 후문에서 철거합시다"

1993년 3월4일 인천시장으로 부임하던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첫 출근 하던 날 이같은 말을 남겼다.

최 전 시장은 1945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서울 보성고교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최 전 시장은 1979년 신민당 김영삼 총재 공보비서관을 맡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1984년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대변인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동참했고, 1985년 신한민주당 부대변인 등으로 활동하고 2월 총선을 이끌며 정치경력을 키웠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에 출마해 당선됐다.

1992년 재선을 노렸지만 낙선했고, 이어 당시의 김영삼 대통령은 그를 인천시장에 임명했다. 그는 한차례 국회의원과 세차례(관선7대, 민선9, 10대) 인천시장을 지냈다.


▲ 가난과의 인연

최기선은 평생 가난에 대한 말을 자주 했다. 그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내 인생을 돌아보건대 '가난'이라는 단어가 잊혀지지 않는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유력 정치인과 함께 민주화의 길을 걷다 국회의원, 시장까지 한 사람이 가난이라고 하니,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이 순간까지 나를 덮는 건 가난의 무게, 가난에 대한 응시, 가난에 대한 안타까움, 가난에 대한 분노다.

그런가 하면 가난에 대한 분석, 가난에 대한 투쟁의식, 가난과 맞서고자 행했던 숱한 행정과 정치적 경험도 있다. 내 세대의 사람들에게 가난은 친형과 같다. 그것은 잊거나 피한다고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만큼 만만치 않은 가난의 굴레 속에서 삶을 보내왔기 때문이다."고 썼다.

김포(통진)에서 1945년 5월15일에 태어난 최기선은 8남매의 장남이었다.

아버지 최중돈은 수백년 간 김포에서 살아온 해주 최씨 집안의 청년이었고 어머니 권순일은 지금은 북한 땅이된 개풍군 풍덕에서 김포까지 시집오신 분이었다.

최기선이 성장한 마을은 해주 최씨 현감공파 반촌으로 인천 천주교의 제2대 고 최기산 주교의 출신 마을 이기도 하다.

1925년생인 그의 아버지 최중돈은 일제시대 소학교에서 학교 성적 우등을 받을 만큼 명석했다. 청년 시절에 그 능력을 발휘해 농토와 임야 등 많은 재산을 확보했고 김포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연이어 사업실패를 맞았다. 사기를 당했고 거의 전재산을 날렸다. 이때부터 최기선의 가난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네에서 유일하게 서울로 유학을 갔다.

서울로 와보니 이곳은 그전과 다른 세계였다. 집에서 부쳐온 쌀 한 말을 친척에게 월세 대신 내고 지냈는데 눈칫밥을 먹다보니 늘 배가 고프고 허기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최기선은 항상 활달하고 명랑했다. 또한 인간적이었다. 그는 "서울 생활에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였다. 특히 나를 감싸고 위해 주시던 할머니, 부모님과 떨어져 산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할머니가 그리워 울기도 했다"고 했다.

최기선이 바라본 세상은 가난으로 고통받는 세상이었다. 가난의 질곡은 끈질겨서 개인의 힘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 무렵 읽었던 많은 책을 통해 이러한 인간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정을 생각했다.최기선은 경제성장을 통해 얻은 이득을 되도록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장 재임기간에 많은 정책에서 이같은 생각을 반영했다.



▲ 민주화추진협의회 대변인

최기선은 신군부의 서슬이 섬뜩하던 1984년 조직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대변인을 맡았다.

1980년대 초반 야당의 양대 세력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제도 정치권 진출이 제한되고 있었다. 김영삼은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고 김대중은 미국에 망명 중이었다. 1983년 5월 김영삼은 단식농성으로 저항했다.

김대중·김영삼의 8·15공동선언 발표를 계기로 양 진영이 결집하여 1984년 5월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했다.

민추협은 제도 정치권 진입을 위한 사전조직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비정치인을 배제하고 규약·강령도 채택하지 않았다. 각종 성명서 및 기자회견을 통하여 반정부활동을 전개했다.

1985년 2월 국회의원 총선거 직전인 1985년 1월18일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하는 기반이 되었다. 신민당은 제1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누르고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민추협은 김영삼과 김대중 양자의 연대와 제도정치권 진출의 기반이 되었고, 한국정치사에 있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김덕룡 국회의원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최기선과 나는 민주화를 향한 영원한 동지가 되었다. 누구보다 총명하고 기민했던 그는 1980년대 김영삼 총재의 무기한 단식투쟁 소식을 국내외 세계의 양심적인 세력에 알려 동조와 연대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했다.

생전의 최기선은 "당시 AP통신 등 세계 각지의 언론사에서 오는 전화를 통해 군사독재 아래 한국정치의 현실을 그대로 알리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 인천시장 시절

김영삼 대통령의 영정앞에서 누구보다 서럽게 울던 이가 최기선 이었다. YS는 누구보다 최기선을 아꼈다.
상도동계 인사들 가운데 최기선 한명만 관선 인천시장으로 보냈다.

최 전 시장은 부패한 정치를 거부했다. 김영삼 총재는 이런 그를 신뢰했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93년 3월 그를 관선 인천시장으로 임명했다.

최 전 시장은 지방자치 부활로 1995년 6월 실시된 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민주자유당 인천시장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리고 1998년 재선에 성공했다.

최 전 시장은 임기 내 인천을 광역시로 승격하고, 인천을 송도정보화도시(Tele port), 인천국제공항(Air port), 인천항(Sea port)을 중심으로 발전시키는 인천 트라이포트(Tri-port) 발전전략을 제시하고, 가장 공들여 추진했다. 이 전략이 결국 오늘날 인천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천시장 시절, YS는 든든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인천공항의 명칭도 최 시장의 노력으로 가질수 있었다. 민주화투쟁 시절부터 쌓아온 YS와 최시장의 동지적 신뢰가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2002년 3억원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며 일생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2005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명예를 회복했다.그는 2006년 지방선거를 끝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최 전 시장은 암 투병중이던 지난 2016년 출판기념회를 열어 오랜만에 인천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미 깊어진 병색으로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인천시(유정복 시장)는 최 전 시장의 장례를 시민장으로 치를 예정이다. 인천시에는 시장 또는 시민장에 관한 조례가 없지만, 내부 논의를 거쳐 시민장 예우를 하기로 했다.

시 관계자는 "유가족과 상의해 5일장 마지막날인 4일 시청 앞 미래광장에 영결식장을 설치해 시민들이 조문할 수 있게 시민장을 거행할 예정이다"며 "시민장 장례위원회 구성과 일정 등에 대해서는 논의를 거쳐 공식적으로 발표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김신호 기자 kknews@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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