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 인하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새해는 매년 1월1일부터 시작하지만 설 무렵이 되면 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설을 지나 이 인사가 끝나야 비로소 한 해가 시작되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신정부터 설까지는 연초 같은 분위기로 항상 들뜨게 된다. 설은 대략 1월20일부터 2월20일 사이에 들게 되어 있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양력과 음력이 섞여 혼동을 줄까?

달력은 매일 일정하게 번호를 붙이며, 여느 날과 똑같은 날을 새해 첫 날이라고 정할 만큼 힘을 갖고 있다. 예부터 권력자들은 이 힘을 이용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시저는 율리우스력을 반포하여 현재의 달력 체계에 근접한 시스템을 수립했고, 중국의 황제들은 수시로 역법을 개편·배포함으로써 우월성을 과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홍집 내각이 주도한 을미개혁으로 1896년 1월1일부터 그레고리력이 공식 역법으로 채택되고 모든 주요 날짜들이 이에 맞추어졌다. 그 후 일제는 우리 전통을 말살하기 위해 음력을 폐지하고 설을 '구정'이라 부르며 쇠지 못하도록 온갖 압박을 가하였다. 일제는 자신들이 먼저 채택한 양력은 우수하고, 음력을 고수하는 조선은 전근대적이라는 생각을 심기에 집중했다.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앞세운 전통 말살 정책은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 군부독재 기간에도 지속되었다. 197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필자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대로, 집에 가서 "우리도 구정을 쇠지 말고 신정을 쇠자"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국민의 열망에 굴복해 음력 1월1일은 1985년에 겨우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 지금의 설이 되었다.

양력은 해의 변화를 보고 만든 것인데, 낮이 가장 짧은 동지는 12월21일 경이고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은 3월20일 경이다. 이처럼 동지, 춘분, 하지, 추분은 그림자의 길이나 태양의 높이 또는 낮밤의 길이 등으로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또 매년 이러한 날의 밤에 보는 별자리가 그 시기에는 늘 일정하다는 것을 고대인들도 알았다. 이렇게 해를 가지고, 다시 동일한 절기가 반복되는 기간을 재었더니 한 해의 길이가 대략 365일임을 알았고 여기에 따라 초기 달력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은 1년의 길이를 365.2425일이라 정하고 만듦으로써 태양의 변화와 날짜를 거의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동양에서도 당연히 태양력이 사용되었다. 동양에서는 천구에서 해가 15도 움직이는 날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24절기이다. 우리가 아는 소한, 대한, 입춘, 우수 등은 모두 해의 위치를 정밀하게 관측해 얻는 것이므로 지금의 양력 달력에서 거의 일정한 날짜에 오게 된다.

해와 달리 달의 모습은 매일 달라진다. 따라서 고대인들에게 달의 변화는 시간의 개념으로 아주 훌륭한 도구였다. 우리말에서 한 달, 두 달 할 때의 달은 당연히 하늘에 떠 있는 달에서 온 것이고, 영어의 month도 moon과 같은 어원이다. 이렇게 달이 차고지고 다시 찰 때까지 시간을 한 달로 정하고 보니, 대략 12번 반복될 때마다 계절이나 별자리들이 제 위치로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1년을 12개월로 하게 되었다.
해의 움직임에 바탕을 둔 양력과 달의 변화에 따른 음력은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고 있지만 아쉽게 1년의 길이가 다르다. 음력 열두 달은 354.3671일이라 한 해에 못 미치므로 가끔 윤달을 넣어 보상한다. 늘 일정하게 2월말에 윤일을 넣는 그레고리력과는 달리 음력의 윤달은 그때그때 달라지는데, 낮이 제일 짧은 동지는 늘 동짓달, 즉 음력 11월에 들게 되어 있다. 동지가 동짓달 초에 들면 설이 지금처럼 늦어진다. 이처럼 음력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24절기라는 태양력이 보조로 사용되었다.

하루를 나누어 24시간, 1440분, 86400초라 정의했는데, 이제 과학에서 시간은 더 이상 하루의 길이와 관계없이 원자의 진동수를 기초로 1초를 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하루나 1년의 길이도 일정하지 않고 수 천 년에 몇 초씩 틀어진다. 심지어 하루의 길이도 엄밀하게 측정하면 일정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의 정의나 1년의 정의를 바꾸지는 않는다. 양력이 음력보다 우수하다고 양력만 쓰라고 하던 일제나 독재정권을 보면 우스울 뿐이다. 시간이라는 자연현상에 정치적 가치를 덧붙이는 순간 합리성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런 눈가림은 언젠가는 그 명을 다할 수밖에 없다. 달력이 계속 발전해 지금과 같은 합리적 체계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사회체제도 그러할 것이다.
/최기영(인하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