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축 마치고 개관 앞둔 인천 대불호텔
조선 땅 밟은 나그네들의 쉼터, 영원한 역사로 남다
▲ 대불호텔(인천 중구 중앙동 1가)이 오는 3월 말 생활사전시관과 함께 '대불호텔 전시관'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다. 대불호텔은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외형을 복원한 재축과 복원의 형식을 함께 사용했다.
▲ 대불호텔 내부는 우리나라 숙박시설의 역사, 생활사 등 고증을 거친 다양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 생활사전시관 안에 꾸며 놓은 옛 중구지역 주택 내부 모습.
▲ 2층의 일본식 목조 가옥 형태로 문을 연 대불호텔은 투숙객이 늘어나면서 1887년 3층의 서양식 벽돌건물로 확장했다.하지만 1899년 경인철도 개통으로 경영난을 맞게 된 호텔은 1918년 중식당인 '중화루'로 개점하게 된다. 사진은 중화루로 바뀐 대불호텔 전경. /사진제공=중구청
호텔 '터' 원형 그대로 남기려 바닥 유리로 깔아 흔적 보존
침대·식탁 등 객실 재현 이어 국내외 숙박시설 기록 전시도
건물 뒤 마련된 생활사전시관엔 60년대 중구 모습이 한눈에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이 오는 3월 말 시민들을 만난다.

'된다' '안 된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새단장을 마치고 '대불호텔 전시관'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다.

대불호텔은 사라진 건물을 원래 자리에 재건축하는 '재축'과 기존의 구성요소를 재조립하는 '복원'의 방식을 함께 적용했다.

겨울바람이 차갑던 2월의 첫 날, 대불호텔과 그 옆 생활사전시관을 찾아가 봤다.

3층 벽돌조 건물이 겨울 햇살을 받아 붉은 빛깔로 빛난다. 새파란 겨울하늘과 대비된 건물은 선명한 붉은 색을 발산하는 중이다.

대불호텔은 남북으로 16.6m, 동서로 13.7m아묘 방형에 가까운 모양을 띠고 있다.
하얀 기둥 사이 아치형 문을 열고 1층으로 들어가자 왼편으로 큰 방이 나온다. 유리바닥 아래로 벽돌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불호텔 터에 남아있던 유구이다.

중구(구청장 김홍섭)는 시민들이 옛 흔적이라도 볼 수 있도록 유구를 그대로 둔 채 바닥을 유리로 깔았다. 이 유구는 국내 초기 서양식 건축기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기초구조물이다.

대불호텔 부지의 원지형은 남서에서 북동으로 경사진 특성을 보여준다. 갈색 사질점토와 명갈색 사질점토를 번갈아 다지듯이 깔아 평탄화 작업을 실시한 것이 확인됐다.

1층 우측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다가가자 대불호텔을 축소한 입체적 모양의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개항의 분위기와 함께 봄·여름·가을·겨울 대불호텔의 4계가 흘러간다. 창문으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칠 때마다 경쾌한 음악이 전시장을 가득 메운다.

나무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1인실과 2인실의 객실을 재현해 놓은 방이 나온다. 고풍스런 침대와 식탁, 그리고 찬장. 정확한 고증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대략 그 시설에 사용했을 법한 가구들이 눈에 띈다.

개항기 대불호텔의 객실은 모두 11개로 1층과 2층에 주로 있었고 3층에 홀이 있었다고 전한다.

헨리 세비지 랜더(A. Henry Savage-Landor)는 저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다이부츠 호텔은 2층 건물이었으며 2층을 침실로 사용했다. 침실은 커튼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침대는 마루 위에 올려놓은 매트에 불과했기 때문에 서양인들에게는 아주 불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2전시실에선 근대호텔과 신문물 관련한 기록을 만날 수 있다. 삼국시대 숙박시설 '우역'에서부터 '신라방', 고려시대 '역참제', 조선시대 외국사신들의 숙박시설 '관'과 공무여행자의 숙박시설 '원', 상인들의 숙박시설 '객주' '여각', 나그네가 쉬어가던 '주막' 등 우리나라 숙박시설의 역사가 펼쳐져 있다.

최초의 국영호텔인 철도호텔, 최초의 상용호텔인 반도호텔과 아사오카, 하나야, 아사히야, 스이쯔 등 일본식 여관과 해리, 스튜어드, 꼬레, 오리엔탈, 터미나스 등 서양식 호텔 사진도 눈에 들어온다. 증기기관차와 철길, 경인철도 등 철도가 생기며 달라지는 역사는 영상으로 만난다.

3층으로 올라가자 넓은 홀이 반겨준다. 이 곳은 앞으로 교육, 문화, 공연, 전시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대불호텔을 다 돌아보고 뒷쪽으로 나와 지하철에 오르면 '생활사전시관'으로 이동해 관람을 계속할 수 있다.

생활사전시관은 60년대 이후 인천 중구의 생활사를 알 수 있도록 꾸며놓은 공간이다. 골덴라사, 신흥전파사, 인천도나스 집 등 인천 중구의 옛 풍물을 유물과 공간으로 접할 수 있다. 동구의 '달동네박물관'과 비슷하다.

대불호텔과 생활사전시관을 돌아보고 나오니 한 세기를 여행한 기분이다.





첫 이름은 다이부츠 … 대불호텔의 변천사


日무역상인 히사타로에 의해 2층 구조 목조가옥에서 시작
전성기때 3층 벽돌건물 변신...경영난에 중식당으로 열기도



1876년 강화도조약 뒤 부산, 원산에 이어 인천항이 1883년 개항하자 수많은 서양의 외교관, 여행가, 선교사, 상인들이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사진과 기록으로 당시 인천 개항장의 모습을 담아냈고, 조선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조선 땅을 밞은 각국의 외교사절과 여행객들의 주 목적지는 서울이었다. 개항 당시 인천~서울 이동시간은 12시간 이상이었다. 오랜 항해를 마치고 제물포에 도착한 여행객들에게 휴식처가 필요했다. 중간 기착지인 인천은 그들이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이 있어야 했다.

일본 나가사키 출신의 무역상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 ?-1898)와 그의 아들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 1870-?)는 이 점에 주목하고 호텔운영을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다이부츠(大佛·대불)호텔이다.

처음엔 2층의 일본식 목조 가옥이었으나,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곧 3층의 서양식 벽돌 건물로 변신한다. 이후 서양식 침실과 식당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서양인들을 고객으로 맞는다.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영국인 탐험가 새비지-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 1865-1924) 등도 대불호텔 투숙객들이었다.

그들은 대불호텔의 전성기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1884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미국군함 주니아타호(USS Juniata)의 해군 군의관 조지 우즈(George W.Woods, 1858-1932)가 남긴 일기장엔 그가 방문했을 당시 막 준공된 다이부츠 호텔을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2층 목조 가옥으로 통상의 일본식 여인숙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일본인 해운업자인 호리 히사타로는 1887년 이 건물을 벽돌조의 서양식 3층 가옥으로 확장하고 1888년부터 본격적으로 호텔 영업을 시작하였다.

인천 호텔업이 쇠락하기 시작한 때는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부터다. 사람들로 북적였던 대불호텔은 극심한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국요리 집으로 간판을 바꿔 단다.

1918년, 뢰(賴)씨 일가를 비롯한 40여 명의 중국인들은 대불호텔을 인수, 일본인과 중국 상인들을 상대로 북경요리 전문점을 창업한다. 중화루는 개점하자마자 그 명성이 인천은 물론 경성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성장하며 다시 인천의 대표적 명소로 우뚝 선다.

그러나 1960년대 '중화루'는 청관거리가 차츰 폐허처럼 변해가면서 경영난에 빠졌고 결국 1970년대 초에 문을 닫는다.

1978년에 건물이 철거될 때 까지 중화루라는 간판은 걸려 있었지만 내부는 월셋집으로 운영됐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대불호텔의 기물이나 중화루의 고급 가구들은 대부분 세입자들이 땔감으로 쓰거나 내다 버렸다고 전한다.

지난 2011년 인천 중구는 문화재위원들의 자문을 얻어 대불호텔 재축(Reconstruction)을 시작해 완공하게 됐다.

/글 김진국 논설위원·사진 이상훈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