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바람
풀잎 끝에 햇살 오오 풀잎 끝에
나 풀잎 끝에 당신 우린 모두
풀잎 끝에 있네 잠시 반짝이네
잠시 속에 해가 나고 바람 불고
이슬 사라지고 그러나 풀잎 끝
에 풀잎 끝에 한 세상이 빛나네
어느 세월에나 알리요?


지난 1월16일을 끝으로 시인 이승훈 선생은 향년 77세의 일기로 영면하셨다. 이상. 김춘수에 이어 한국 모더니즘문학의 한 계보를 계승하면서 한국문학의 세계성에 지대한 업적을 이룩한 고인의 시적 업적은 후대 시인들과 학자들이 다시 조명하여 기록할 것이다. 오늘 아침의 시가 다소 무겁게 소개되는 것은 최근 한국시단에서 훌륭한 시인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고 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나, 너, 그'로 명명되는 대상과 그 대상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한 탐구로 일관했던 시인은 종내 '나도 없고 너도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아찾기 시작태도는 치열했다. 그의 일생의 시작(詩作)은 특히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라는 아방가르드적 전위성으로 규명되면서 후배 시인들과 시학연구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그 전위성은 다시 한국 불교의 禪과 회통하면서 시세계의 지평을 한층 심화 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생이 한순간의 호흡 마디에 있고, 한순간 호흡의 마디가 한 찰나에 있다고 한다. "풀잎 끝에 있는 나, 풀잎 끝에 있는 당신, 풀잎 끝에 빛나는 한세상" 그 짧은 시간의 외줄 위에서 눈 한 번 감았다가 떳을 뿐인데 벌써 서산에는 붉은 노을뿐이더라는 제행무상(諸行無常)에 대한 회향이다. 가고, 오고, 웃고, 떠들고 했던 모든 순간들이 영원하리라고 착각하면서 경망스럽게 살아온 나를 숙연하게 한다. 시인이 남긴 시의 지평과 깊이를 생각하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시인 주병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