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렌' 따라 움직이는 세상
▲ 1907년 화재 감시를 위해 자유공원에 설치한 소방용 망루와 사이렌 탑. 전시체제로 돌입한 1940년부터는 매주 월요일 오전 7시 사이렌 소리에 맞춰 궁성요배(宮城遙拜)를 하고, 정오에는 묵도와 신사참배를 해야만 했다. 사이렌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일상 통제를 위해 사용된 억압과 구속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 중·일 전쟁 당시 일본 본토로 군사미를 반출하기 위해 인청항까지 경기 미곡을 실어나르던 수인선. 인천 연안에서 생산된 천일염을 한반도 전역으로 운송하는 역할도 했다.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인천도시역사관
1937 중·일 1941 태평양 전쟁
수인선 개통해 경기미곡 운반
부평엔 무기생산 공장 들어서

'일본과 조선은 하나' 내세워
물자지원 명분 확보·일상통제




인천시립박물관의 인천도시역사관이 1층 근대도시관에서 1883년 개항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인천의 확장과 변천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3부 군수도시에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군수기지로 이용됐던 인천의 모습을 살펴본다.


▲군수공업도시, 인천(1936-1945)

식민통치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했다. 이를 계기로 중일관계는 악화됐고, 일본은 본격적인 군국주의 체제로 전환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데 이어 1941년 미국과의 사이에 태평양전쟁을 시작했다.

강대국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일본 본토의 자원과 산업시설만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식민지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까지 동원해야 했다. 일본은 항만과 철도가 연결되는 편리한 교통과 산업 기반시설을 일찍부터 갖추고 있던 인천을 한반도의 군수기지로 건설하고자 했다. 도시의 영역을 확대해 기존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를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중화학공업 위주로 전환했다.

일본이 식민통치의 상징으로 삼았던 인천은 이제 그들의 전쟁수행에 물적 기반을 제공하는 군수공업도시로 변해갔다.

▲도시의 확장

1937년 4월 조선총독부는 '인천시가지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인구 20만 명을 목표로 가로망을 구성하고, 공업용지와 주택지를 구획하는 등 시가지 정비를 시도한 최초의 도시계획이었다. 이에 앞서 1936년 9월 인천부는 도시의 영역을 지금 숭의동, 도화동, 용현동, 주안동, 학익동, 옥련동 일대로 확장했다.

한편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본격적인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공업단지 조성이 시급해졌고, 1940년 1월 조선총독부는 경성과 인천사이에 대단위 군수공업단지를 조성하려는 목적에서 '경인시가지계획'을 공포했다. 그에 따라 300만 평에 가까운 부평에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섰고, 부천군의 서곶, 문학, 남동, 부내면 등 4개면이 인천부에 편입됐다. 두 번에 걸친 도시의 확장으로 인천부의 면적은 20배 가량 확대됐고,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도 중공업 위주로 개편됐다.

▲인천의 병참기지화

중일전쟁이 벌어졌던 중국 내륙까지 무기와 군수물자를 수송하는데 있어 인천은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찍부터 산업도시로 성장했던 인천은 철도와 항만을 통한 운송과 전기 및 공업용수의 공급이 편리했고, 풍부한 노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도시계획으로 공장 부지가 확보되면서 인천에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다양한 공장이 건설됐다. 공장 주변으로 노동자를 위한 집합주택과 사택들이 들어서게 돼 인천의 모습은 점차 군수도시로 변해갔다.

한편, 수원과 인천을 잇는 수인철도가 개통되자 경기 내륙지역에서 생산되는 미곡은 군수미가 돼 인천항을 통해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전쟁터로 운송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인천은 일본의 전쟁수행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생산, 집하해서 수송하는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됐다.

▲전쟁 물자를 생산했던 군수공장

중일전쟁 이후 인천의 산업구조는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생산하는 중화학공업 위주로 변해갔다. 1937년 '인천시가지계획'에 따라 구획된 학익동과 용현동 일대로 조선중앙전기, 히타치(日立)제작소, 군용 페인트를 생산했던 경성화학공업 등이 들어섰으며, 만석동 매립지에는 조선기계제작소, 도쿄시바우라(東京芝浦)전기, 일본차량제작소, 조선이연금속회사 등의 공장이 건설됐다.

1940년 '경인시가지계획'으로 인천부에 편입된 부평지역에는 차량용 강판을 제작했던 경성공작소를 비롯해서 히로나카(弘中)상공, 디젤자동차, 국산자동차공업 등 차량 및 기계공장이 들어섰다.

한편, 도쿄에 본부를 두고 전쟁 무기의 생산을 담당했던 일본육군조병창은 부평역 일대 36만 평의 부지를 매입해 일본육군인천조병창을 건설했다. 직접 무기를 생산했던 조병창을 비롯해서 각종 군수공장이 밀집해 있던 인천은 일본이 일으킨 세계대전을 수행하는 명실상부한 군수도시가 됐다.

▲쌀과 소금의 철도, 수인선

1930년 11월 경동철도주식회사는 여주와 수원을 잇는 협궤철도 수여선을 개통했다. 여주, 이천 등 경기 내륙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수원까지 운반하고, 이를 다시 경부철도로 부산까지 실어 나른 뒤, 부산항을 통해 일본 본토로 반출하기 위해서였다. 만주사변 이후 중국과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일본은 1937년 7월 수여선을 인천항까지 연장하는 수인선을 개통했다. 중국과의 전쟁이 시작될 경우 중국에서 가까운 인천항을 경유하는 것이 군수미의 운송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인선은 공사기간과 공사비를 절약하기 위해 레일 사이의 폭이 좁은 협궤철도로 건설됐으며, 인천항에 종착역을 둬 운송되는 군수미를 선박에 그대로 선적할 수 있었다. 한편, 수인선은 남동, 소래 군자 염전 등 인천 연안의 염전지대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을 수원을 거쳐 한반도 전역으로 운송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통제된 사회, 획일화된 도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물론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한반도 전역이 전시체제로 돌입하게 됐다. 이듬해 4월 일본 정부는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통제하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에게 전쟁 지원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화(內鮮一體化)와 '일본, 조선인은 모두 천황의 신하이자 백성'이라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내세우며 창씨개명과 조선어 사용금지 등 민족 말살 정책을 펼쳐 나갔다.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결성된 민단 단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은 각 지방마다 지역 연맹을 결성해 일본 정부의 시책을 적극 동조하는 여론을 조성했다. 인천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국민정신총동원 인천연맹에서는 하부 조직인 애국반(愛國班)을 동원해 다양한 방식으로 자발적 공출과 지원병 모집을 독려했다.

개항 이후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근대도시 인천은 전쟁에 모든 자원이 동원되는 통제된 사회, 획일화된 도시가 됐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