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호 언론인
아파트 위층 집에는 아들이 셋이다. 초등학교 다니는 망아지 같은 녀석들이다. 위로 두 아이는 태권도장에 다닌다. 저녁 무렵이면 난리다. 달리고 치고받는 소리가 천정을 뚫고 머리맡으로 쏟아진다. 과일을 사들고 몇 차례 방문해 하소연했지만 소용없다. 이후 그러려니 하며 산다. 아이들이 얼른 커 조신해지길 기다릴 뿐이다.
얼마 전 '층간 내리사랑'이란 공익광고를 접했다. 위층은 아래층을, 아래층은 그 아래층을 배려하자는 캠페인이다. 그게 층간소음 갈등 해소책이거나 이웃 간 사랑법이란다. 소가 웃을 일이다. 피해자들로서는 시쳇말로 '의문의 일패'를 당한 셈이다.

뻔한 얘긴데, 층간소음 책임은 오롯이 국가에 있다. 값 싼 공법으로 빠르게 지은 아파트의 대량 공급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국가권력과 토건세력 담합의 소산이다. 덕분에 토건업자들은 배를 불렸고, 입주자들은 피할 길 없는 만성적 층간 소음에 시달린다. 더러 '층간 내리사랑' 아닌 층간 갈등'으로 사람이 죽어나간다. 이게 사람 살라고 지은 집인가 싶다.

공익광고는 말 그대로 공공이익을 앞세운다. 비영리, 비정치성은 존재의 근간이다. 더러 휴머니즘을 좇는다. 환경보호나 안전, 헌혈, 금연, 물자절약 캠페인이 만만한 주제다. 하나, 비정치적 입장 역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이따금 본질을 가려 엉뚱한 쪽에 화살을 돌린다. 몇 해 전에는 '아이를 혼자 두지 말라'는 캠페인도 내놨다. 밥벌이와 아이 돌봄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이들에게 이런 광고는 폭력이다. 이밖에도 이런저런 헛발질이 왕왕 눈에 띈다. 수용자 처지를 알지 못하거나, 알려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층간 내리사랑' 역시 마찬가지. 층간소음이라는 정책 오류를 피해자의 미덕(美德)에 기대 가리려 한다. 아파트 건축 과정의 돈과 결부된 정책적·구조적 문제를 달달한 '이웃사랑 코스프레'로 뒤덮으려 한다. 이웃 사랑이 충만하면 고질적 층간소음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걸까. 그럼으로써 이대로 쭉 가도 좋다는 걸까. 공적자금으로 공중(公衆)을 농락하는 맹랑함에 입맛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