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불편이란 열매가 존재한다면, 단지에 채워 넣고 설탕이 골고루 스며들게 숙성시켜 보고 싶었다. 마치 매실 청을 담그는 것처럼 말이다. 편리를 좇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노숙의 밤을 지새우는 게 어디 약자만의 몫일까마는 관심의 사각지대를 떠도는 영혼들에 대해서도 회복이란 이름으로 잠시 묵념해 보았다. 애동지에 냉동시켜 두었던 팥 시루떡을 다시 쪄 먹어보니 노동지에 먹던 팥죽만큼 구수함은 없어도 동짓날 기분을 낼 수 있었다. 하여 저장된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건 삶을 이어가는 전조행위였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존재 자체가 그저 고마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먹을 수 없을 만큼 시고 텁텁한 매실을 설탕에 쟁여놓은 것을 만병통치약 쯤으로 여기셨다. 여름엔 기력을 높인다고 한 잔. 소화 장애를 예방한다고 한 잔. 피로회복에 한 잔. 변비와 빈혈에 좋다고 한 잔. 해독과 살균작용에 좋다고 허구한 날 매실차 한 잔 씩을 건네주셨다. 새해 들어 그 매실차가 떠오르는 건 볼품없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묵혀져 새것에 신열을 앓아 허리 굽어가는 우리 사회의 등을 다독여주길 바라는 마음이 무술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 낡고 오래된 것들은 무방비와 무대책이 정체성이었을지 모른다. 고압적이며 전략적인 자본의 독성에 쉽게 마음을 내려놔 백년사랑마저도 뭉칫돈이면 영혼마저 내줘버리는 것을 허다하게 봤기 때문이다. 돈의 위세에 굽실거리고 표피적 편리를 쫓는 습성을 버리지 않는 한,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우리 미래일지 모른다. 얼마 전 애관극장 뒤편 능인사 앞을 지날 일이 있었다. 지금은 모텔과 주택이 들어섰지만 30여년 전만 해도 그 자리엔 유항렬 주택을 닮은 붉은 벽돌조의 2층 건물이 고즈넉하게 있었다. 목조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마치 교실 같은 분위기로 단락 지어져 있는 방이 여럿 있던 집이었다.

거기엔 드럼으로 빗소리를 낼 수 있다던 무명의 세션과 당시 밤무대의 사이먼과 가펑클이란 닉네임을 가졌던 '톰과 제리'가 살고 있었다. 대각선 방에는 말 수 적은 화가가 자신이 그려 놓은 그림을 몇 시간째 바라보고만 있기도 했던, 그런 분위기의 집이었다. 그러나 그네들이 살았던 집은 단순한 벽돌집이 아니었다. 사글세에 바퀴벌레가 득실거렸고 총각냄새와 남루한 빨래들이 실내를 채웠지만, 엄연히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 있던 학교였었다. 'Collins Boys Day School' 미국의 독지가 콜린스의 기부로 세워진 학교를 굳이 '콜린스 주간 소년 학교'라 직역하는 게 좀 껄끄럽지만, 명색이 인천 교육사에서 영화학교에 버금가는 신식 학교였음을 돌이킬 수 있었다.

흐지부지 사라진 게 어디 이뿐이겠냐마는 자본주의 세상에 제 영혼을 팔아넘기는 파우스트와 같은 상황은 인천 도처에 얼마든지 있어 왔다. 공공성의 이름으로,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문화 트렌드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본래의 취지와 역사적 가치와는 상관없이, 낡고 보잘 것 없고 불편하고 위험하고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흔적을 지워왔던 게 그 간 낯 뜨거운 인천의 이력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진행 중인 가톨릭회관(1973) 철거과정을 목격하면서 드는 감정은 송곳에 찔리는 듯 아려왔다. 필자 개인적으로 연극무대를 처음 경험했던 공간으로서,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황토 나대지를 선친의 항아리 창고로도 활용됐던 공간으로서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청년기 들뜬 마음을 냉철하게 가라앉혀 주던 공간이 가톨릭회관이었음을 생각할 때, 추억의 장소를 단숨에 삭제시켜 버리는 도시의 표상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추억의 장소에 대한 상실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인천 상업은행, 산업은행, 한국은행 인천지점, 키네마 극장, 동방극장, 인영극장, 인형극장, 축현초등학교, 신흥초등학교, 박문초등학교와 수녀원, 하물며 국일관에 이르기까지 추억의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혔지만 머릿속에는 당시 잔상들이 교차돼 통증이 유발되고 있었다. 일개 시민에게도 도시를 추억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을 받는다면, 비장하게 작성된 소장 한 뭉치를 인천시민 사회에게 내놓고 싶은 심정이다.

한 모금의 매실차에는 시간과 정성과 특정할 수 없는 오묘함이 배어 있었다. 모성의 깊은 손길이 철부지 돌팔매 장난에 버려질 법한 열매가 어떻게 하면 환골탈태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살아생전 어머니께서 무시로 건네주시던 매실차였는데라고 말하고 스승의 가르침이라 기억해 본다. 무술년을 맞아 매실차 한 잔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심코 바라보니 세상이 온통 유심하지 않은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