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근 이천발전연구원장(前 경기도기획조정실장)
남양주시 능내리에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와 묘소가 자리를 잡고 있다. 한때 남양주시 부시장을 지냈던 인연도 있어 자주 찾는다. 묘소에 참배한 후 집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을 바라보면서 현인(賢人)을 만난다.
다산이 말년을 보냈던 사랑채에는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다산이 직접 써서 붙인 것이다. 다산의 저술인 '여유당기'(與猶堂記)를 통해 그 뜻을 헤아려 볼 수 있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다.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 할 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하고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노자에 "여(與)여! 신중하기는 코끼리가 겨울 시냇물가 살얼음을 건너는 것과 같고, 유(猶)여! 삼가기는 원숭이가 주변을 살피는 것과 같이 하라."는 말이 있다. "이 두 마디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말이 아니겠는가."

다산의 생각을 좀 더 짐작해 보려면 당시 시대적 배경부터 살펴봐야 한다. 다산이 형조참의로 있던 1799년 정조 23년은 그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다산을 비롯한 남인들의 정치적 스승이었으며 정조의 충직한 신하였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선생이 돌아가시기도 했다. 정조는 다산을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기에 곧 그가 판서가 되고 재상에 올라 제2의 채제공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다산에 대한 정조의 신뢰가 이러하자 노론 벽파는 그를 제거하려 한다. 하지만 명분이 없었다. 다산은 1797년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본인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모두 고백했고, 그 뒤 곡산 부사로 외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고 돌아왔기 때문에 트집을 잡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노론은 다산 대신 형 정약전을 공격해서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당시에는 함께 관직에 올라있는 가족 중 누군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면 다른 가족도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다. 다산은 세상이 원망스러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관직을 물러난 후 1800년 정조 24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랑채에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걸고 은신하였다. 그 해 여름 정조가 승하하자 다산은 정적들의 무차별적 공격으로 처지가 더욱 위태롭게 되었다. 결국 정조 사망 이듬해인 1801년 정약용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18년이라는 기나긴 유배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 18년이 단순한 고난의 세월만은 아니었다. 다산은 세상에 대한 원망 대신 그간 쌓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저술 작업에 매달린다. 그 결과 500권에 달하는, 역사상 가장 방대하고 창의적인 저술을 남김으로써 우리 민족 최고의 사상가이자 실학자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렇게 18년간의 유배를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후 선생은 '여유당' 현판 아래에서 말년을 보낸다.
불세출(不世出)의 대학자요 경세가(經世家)인 다산도 '여유당'이란 편액을 방문 앞에 걸어놓고 끝없이 자신을 경계하였다. 나도 다산을 생각하며 스스로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