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제물포가 개항되면서 청과 일본을 비롯해 서양 상인들이 밀려들었고, 독일계 마이어상사의 아시아 지사였던 세창양행은 1884년 제물포에 지점을 개설하여 근대 물품을 들여와 팔았다. 여러 물품이 있었지만, 최고의 히트 상품은 금계랍이었다.
세창양행은 <한성주보> 이외에 <독립신문>에도 꾸준하게 금계랍을 광고했다. 금계랍은 말라리아 특효약 퀴닌(quinine)을 음차한 것으로 발음이 어려워 '갱개랍'이라 불리기도 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이틀에 한 번 앓는 학질을 속칭 당학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병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것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 10명 중 4~5명이 사망할 뿐 아니라 힘이 강한 소·장년층도 수년 동안 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계랍이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이후 1전어치의 양만 먹어도 학질이 즉시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우두법이 들어와 어린아이들이 잘 자라고 금계랍이 들어와 노인들이 수(壽)를 누린다'는 유행가가 나왔다."라고 적고 있다.
금계랍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긴 사람들은 열이 난다 싶으면 이 약을 먹었고, 특유의 쓴맛 때문에 아이 젖을 떼기 위해 젖꼭지에 바르기도 했다. 그 무렵을 살았던 이들이 인생살이에서 처음 경험하는 쓴맛이 금계랍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금계랍은 유럽의 근대의학이 처음 발견하거나 발명한 것이 아니었다.
신대륙의 인디오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금계랍나무의 수피(樹皮)가 말라리아에 특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원주민이 약재로 사용하는 것을 본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것을 스페인으로 가져오면서 서양 의학에서도 약재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다시 아시아로 건너와 히트 상품이 되었다. 근대의 비극은 이처럼 본래 자신의 지식이자 산물이었던 것조차 서구로부터 다시 배우고, 사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품이 되었다.
/황해문화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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