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그대를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대를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물 빠진 뻘밭에서 갯흙을 일으키며 헤매던 지난여름
무언가가 기어간 흔적에 한나절 따라가다 가뭇없이 눈 들자
바다 너머 하늘에 가 닿아 있던 온몸으로 간 흔적,
그 한 평생의 궤적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대여, 더 멀리 떠나가세요
아득할수록 깊게 꽃 핍니다
서른 해 이끌고 온 지친 몸 남루한 한낮
그대를 다시 찾아갑니다

한 눈에 알아보았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한 눈에 사랑하였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지성이나 가슴이 아닌, 미 혹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관조의 결과로서 사람들이 느끼는 혼의 이 강력하고도 순수한 고양"이 '시'라고 말한 포우의 말을 바탕으로 구광본의 이 시를 들여다 본다면 너무 상찬이 될까? '물 빠진 뻘밭에서 갯흙을 일으키며 헤매던 지난여름/무언가가 기어간 흔적에 한나절 따라가다 가뭇없이 눈 들자/바다 너머 하늘에 가 닿아 있던 온몸으로 간 흔적,/그 한 평생의 궤적'이 그가 온몸으로 밀고 온 길, 혹은 밀어 가고자 하는 삶의 조건들로부터의 초탈이라면 구광본의 이 '서른 해'는 분명 근대적이고 기계적인 시간이 아니라 시인이 가서 닿고자 하는 존재적인 시간일 것이다. 그리하여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이 야기하는 효과를 통해 내부 감정, 관조적 혼의 상태를 암시하고 '한 눈에 알아보았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고 '그대여, 더 멀리 떠나가세요/아득할수록 깊게 꽃 핍니다'라며 감각적 삶의 바탕들에 대한 비의를 아름다운 고통으로 노래하지 않는가. 항상 곁에서 그리고 멀리서 '서른 해 이끌고 온 지친 몸 남루한 한낮/그대를 다시 찾아'가는 것이 오늘 아침 이 시의 가장 정당한 존재이유가 될 것이다.

/주병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