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해수욕장·수족관 … 인천서 시작된 '근대사회'
▲ 한국 최초로 개장된 월미도 조탕시설. 숙박·휴게시설도 갖췄다.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개항 초기 인천항은 열려진 창이었다. 개항은 반강제적이었기에 서구 자본주의 변방에 편입되는 사건이었다. 바다를 향한 진출과 도전의 의미보다 새로운 문물의 수용과 수탈의 의미가 강했다.

당시 인천은 '1개의 초라한 어촌과 15개의 오두막', '망막한 한촌'에 불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개항은 인천 지역을 일거에 바꿔 놓은 대변혁의 신호탄이었다. 열강들의 이권경쟁이 치열했던 시대, 개항은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던 것이다. 국제항 인천항으로 서구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인천은 해불양수(海不讓水,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인다)'라는 인천의 정체성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개항과 함께 근대문물을 받아들인 인천은 어촌마을에서 근대도시로 변모한다. 연안 도서와 내륙을 잇는 작고 한적한 포구에서 근대 조선으로 이끄는 동맥의 역할을 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조선인 무역상인 순신창상회의 탄생,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임해유원지 월미도와 조탕, 동양 최대의 갑문식으로 유명한 인천항 독(Dock) 설치, 세관 감시선 광제호와 월미도 간의 국내 최초 해상무역통신, 국내외 선박 항행을 위한 기상관측 등도 다 인천에서 이뤄진 해양의 역사인 것이다. 바다건너에서 인천에 유입된 근대 해양문물들을 알아본다.

▲ 월미도 산 정상의 무선 전신소.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최초의 무선통신

1876년 개항 이전 조선의 주요한 통신 제도는 역원과 봉수였다. 그러나 역원과 봉수 제도가 문란해지자 개항 이후 조선정부는 근대 문물과 관련 소식 중에서도 전신과 관련된 소식에 주목했다.

전신이 도입될 수 있다면 역원과 봉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르고, 민간에서도 이용할 수 있어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1884년 4월에는 최초로 일본의 나가사키와 조선의 부산이 해저 전선으로 연결됐다. 1885년 9월28일에 처음으로 인천~서울간 전신이 개통됐다.

이와 함께 이탈리아의 마르코니가 개발한 무선 전신이 상용화 되면서 1910년 월미도에 무선전신소가 세워지고 같은해 9월 무선 전신 시설이 설치된 광제호와 월미도 간에 무선 전신을 개시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해상과 육지의 최초 무선 통신이었다.

▲ 조선 인천 월미도 조탕 남자 욕장 내 분수. /사진제공=인천시화도진도서관

▲월미도 조탕

월미도는 1915년 '인천부 부세일람'에서부터 명소 고적으로 소개됐던 섬이다. 월미도가 본격적인 관광지로 개발된 것은 1923년 북성지구에서 월미도까지 약 1㎞에 달하는 제방 축조공사가 완공되면서부터다. 월미도가 육지와 연결된 것이다. 한강에서 흘러드는 급한 물살을 막기 위해서였다.

1923년 7월10일 남만주철도회사는 월미도에 우리나라 최초이면서 유일의 조탕시설을 개장했다. 조탕은 일반적인 바닷물이 아니라 지하 암반층에서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한 지하수를 끌어올려 이를 끓여 목욕물로 사용했다.

조탕 건물은 내부에 숙박과 휴게시설을 모두 갖추고, 서구식 무대장치를 마련한 연무장을 설치해 첨단시설을 자랑했고 전국 최고의 명소로서 이름을 날렸다.

월미도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으나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날 새롭게 조성된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 해수 족욕탕이 조성돼 관광객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전해주고 있다.

▲ 인천 묘갑 해수욕장전경.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묘도해수욕장

묘도는 1906년 준공된 인천 만석동 매립지 끝부분에 있던 섬이다. 묘도해수욕장은 일본인에 의해 복성동 외국인묘지(지금의 숭의발전소 자리)에서 묘도에 이르는 갯벌을 매립해 종합 휴양지로 꾸미기로 하면서 1906년에 개장했다. 이는 1912년 일본 자본의 송도유원주식회사에서 개발한 부산 서구의 송도해수욕장보다 6년 앞서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 해수욕장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전해지는 묘도해수욕장 사진엽서에는 묘도의 바위섬 아래로 휴게실로 보이는 목조구조물과 함께 다이빙대를 비롯한 시설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묘도해수욕장 인근 언덕에는 휴양 호텔인 팔경원이 지어졌는데, 지금의 괭이부리마을이 있는 곳이다.

만석동에는 해수욕장과 팔경원 이외에도 일본인이 운영하던 묘도 유곽이 있었다. 휴양 시설들은 1923년에 건설된 종합휴양시설인 월미도 유원지보다 약 15~16년보다 앞서는 것이다. 묘도는 이후 1937년 공장부지 활용 등을 목적으로 매립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 인천 사진엽서 인천항과 수족관.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인천의 수족관

1915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강점한 지 5주년을 기념하고, 식민지 지배의 성과를 국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 경내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다. 경복궁 외부에도 별관이라는 이름으로 박람회장이 만들어졌는데, 인천 사동 일대에 인천 수족관이 별관으로서 개설됐다. 이는 수족관으로서는 국내 최초 사례다.

인천 수족관은 본관이 357㎡(약 100평) 규모로 세워졌고, 부대시설을 포함한 전체 면적은 10,400㎡(3145평) 정도였다. 수족관에는 악어를 비롯한 각종 어족자원은 물론 독도의 강치와 인천 앞바다에서 어부의 그물에 걸렸던 고래도 전시됐다.

50일 동안 유료 관람객이 9만8000명에 달했다. 1915년 인천 인구가 3만828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대성황을 이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국내 최초로 인천에 수족관이 일정 기간 운영됐다는 것은 해양도시 인천의 성격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 개항기의 상자들. '미국 솔표 석유', '뉴욕쓰탠다' 라고 적혀있다.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상회사(商會社)와 민간해운업의 태동

1883년 인천항 개항 후, 조선상인들은 선진적인 경영 기법과 풍부한 자본, 독점 무역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가진 외국 상인과 경쟁해야 했다. 이러한 외국 상인들에 대응해 세워진 주요 상회사로는 대동상회와 순신창상회 등이 있었다.

대동회사는 최초의 상회사로서 1883년 설립됐으며, 청과의 무역에서 자본을 축적한 평안도 상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관료도 참여했다. 순신창상회는 1883년 정부 관료인 참의 민응식이 사장을, 참의 신기선이 부사장을 맡은 일반 상회사였다. 주로 국내 상품의 수출과 구미인들을 위한 수입 무역과 여관업을 했다.

한편 당시 조선 정부에서 도입해 주로 세곡 운송 등을 전담한 증기선에 자극을 받아 1886년 10월에 서울 사람들이 대흥상회를 설립했다. 대흥상회는 72톤급 기선을 1만 달러에 구입해 대흥호라고 이름을 짓고 해운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화물량 부족 등으로 결국 1년여만에 파산하고 말았다.

대흥상회는 우리나라에서 민간인이 창설한 최초의 기선회사였으며, 대흥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소유 기선으로서 근대 해운업의 태동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 갑문 안으로 입항하는 기선 사진엽서.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인천항과 갑문

'일제가 만든 갑문 100주년' 축하하기도, 비난하기도 …


인천항은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건설한 갑문을 중심으로 내항과 외항으로 나눠진다. 내항은 48척의 선박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다. 갑문으로 항상 일정한 수심을 유지할 수 있어서 자동차나 반도체 장비, 정밀기계부품, 양곡 및 일반잡화 화물처리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외항은 컨테이너 터미널이 있는 남항, 산업원자재화물을 처리하는 북항, 연안여객터미널이 있는 연안항, 송도신도시 남쪽 인천신항, 아암물류 단지내 국제여객터미널로 구분된다.

인천항은 1883년 개항했을 당시에는 천연지형을 이용해 약간의 화물이 드나드는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1884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항구 공사를 했으나 항만으로서는 초보적인 시설에 불과했다.

청일 전쟁 이후 인천항은 미곡 반출의 창구로 이용됐고 수도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1900년 경인철도의 개통에 힘입어 무역액에서 상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철도의 개통 이후 인천항의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때문에 만조와 간조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선박이 입항할 수 있고, 필요하면 언제나 짐을 싣고 내릴 수 있는 독(Dock, 선거)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이에 1911년부터 1918년까지 7년여 공사 끝에 10m가 넘는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할 수 있는 '이중 갑문식 독'을 구축했다. 이중 갑문식 독은 동양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4500톤급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다. 또 내항으로 토사가 밀려들어 쌓이는 것을 막고 배가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 위해 1923년에는 제방축조공사를 마무리했다. 인천항은 비로소 전천후 상업항으로서 기능을 갖게 된다.

이어 1960년대에 물동량의 급속한 증가에 따라 인천항에 현대식 대형 선거 건설에 나서 박정희 정부 때인 1974년 현재의 갑문인 제2선거를 준공, 오늘날 국제항의 면모를 갖춘다.

내년이면 인천항 갑문을 조성한 지 100주년이 된다. 하지만 갑문은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든 것이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닌 만큼 경축행사를 열만한 일은 못된다는 지적이다.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은 "이토 히로부미가 만국공원에서 열린 인천개항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대일본 제국이 조선에 와서 가장 잘한 일은 인천축항을 만든 일이다'라고 했듯이, 갑문완공일을 우리가 경축할 만한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