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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환 칼럼] 구상 ·황용주·한웅진, 그들과 박정희의 시대

논설실장

2017년 11월 15일 00:05 수요일
▲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황용주.1962년 12월 경. /자료제공=안경환 저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그 '박정희'가 100년 전 태어났다는 날에 이 글을 쓴다. 일생을 포연(砲煙) 자욱한 시대를 뚫으며 끝내 총성 속에 생을 마무리한 사내. '근대화의 영웅'에서부터 '무참한 독재자'까지 엇갈린 평가가 오늘도 격하게 부딪히도록 살았던 문제적 남자. 감히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며 한 시대를 질타해 나간 천생(天生)의 무인(武人).

오늘은 그를 둘러싼 시시비비에서 좀 떠나보자. 그 머리 아픈 논란보다는 그의 인생 친구들 얘기나 풀어보도록 하자. 그에게는 사연만 들어도 가슴이 아릿해 오는 마음의 친구(心友)들이 있었다. 그에게는 영욕을 함께 했던 친구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의 친구들은 이른 아침 강 안갯속을 걸어오는 실루엣처럼 줄곧 그의 뒤편만을 서성였다. 그러면서도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를 그리워 했다. 빛나는 우정이라기보다는 비련의 주인공들 같은 친구들. 구상, 한웅진, 황용주였다. 각각 시인, 장군, 언론인이다.

전남 장성 출신의 한웅진 장군은 육사 2기 동기생으로 만났다. 일본 중앙대를 다니던 중 학병에 끌려나갔다. 해방이 되자 '부국강병이 아니면 또 일본에 당한다'며 군문으로 나섰다. 성정이 대쪽같고 의협심이 강해 함부로 가까이 하기 어려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믿고 당시 군에서 떵떵거리던 김창룡 특무대장에게 권총 결투를 청해 '지독한 사람'으로 통했다. 그러나 육사에서 다섯살 위의 박정희를 만나자 바로 '형과 아우'로 의기투합한다. 1949년 박정희가 남노당의 군 세포 주모자로 체포돼 모진 고문끝에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빨갱이의 '빨'자만 들어도 소스라치던 시절, 세상이 모두 그를 외면했다. 단 한사람, 한웅진 소령만이 형무소를 찾아 옥수발을 했다. 훗날에도 한웅진은 가난한 군인 박정희의 집에 쌀이 떨어졌다는 소문을 들으면 몰래 당번병을 보내곤 했다.

이북에서 월남한 시인 구상은 6·25 전쟁 통에 박정희를 만났다. 시인은 국방부 정훈국 보도대장으로 6·25 전장을 종군하며 대령까지 오른다. 박정희가 군에서 유일하게 마음으로 복속(服屬)했던 이용문 장군이 시인을 소개했다. "이 자는 의기(義氣)의 남아야"가 소개담이었다. 시인과 박정희는 서로를 깎듯이 높이는 술 벗이었다. 두 사람을 맺어준 이용문 장군이 먼저 가면서 더욱 살갑게 술과 우정을 나눴다. 훗날 시인은 그와의 일들을 예닐곱편의 시로 남긴다.
경남 밀양 출신의 황용주는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사범학교 동기생으로 만났다. 황의 불온서적 소지가 발각돼 퇴학당하면서 둘의 관계는 한참 끊어진다. 황도 일본 와세다대학에 다니다 학병으로 끌려가 중국에서 해방을 맞는다. 잠시 고향에서 머물다 부산일보 주필을 맡으면서 언론인의 길을 간다. '부산일보에는 황용주, 국제신문에는 이병주.' 부산 언론계의 이른바 '주필 전성시대'를 열어젖힌다.〈안경환 저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1960년 박정희가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둘은 30여년만에 재회한다. 동래로, 송도로 돌아다니며 술과 우정을 나누던 그들은 어느덧 '거사'에 의기투합한다. 모순과 불의에 절은 조국의 모습에 한숨짓던 변방의 기자는 장군 친구에게 오히려 쿠데타를 부추긴다. D-데이가 다가오면서 둘은 거사자금 마련에도 머리를 맞댄다. 군 수뇌부가 썩었다며 실망하는 친구에게 박정희는 말한다. "걱정 마, 도의적으로 말짱한 사람이 여기 있어"
이 무렵의 어느 술 자리 풍경을 시인 구상이 시로 남긴다. 〈귀로(歸路), 대구서 만난 장군 박정희는 이미 눈에 핏발이 서려 있었다/내가 피정(가톨릭 용어로 묵상의 뜻)의 여운으로 화제를 쇄락으로 몰고가도/ "해치워야 해"를 주정 섞어 연발하며/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떼들을 보네'란 일본 시음을 되풀이해 불렀다/40일만에 돌아온 서울은 그야말로 북새판이었다.(후략)〉
한웅진 준장은 2군 부사령관으로 내려 온 박정희에게서 쿠데타 계획을 처음 듣는다. 일신의 생사와 가족의 안녕까지 걸린 일이지만 두말없이 바로 가담한다. 그는 1960년 5월15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박정희의 바로 곁에서 숨가쁜 시간을 보낸다. 모의는 초저녁부터 탄로나고 진압군이 편성되던 절체절명의 시간들. 김포의 해병여단으로 향하던 지프 안에서 둘은 줄담배로 두려움을 달랜다. 마침내 한강을 건너면서 한은 박에게 말한다. "형님, 방송국 접수하면 혁명공약을 직접 방송하시죠" 이 시간 황용주는 부산에서 '군사 혁명' 호외 발행을 위해 밤을 지샌다.

마침내 거사는 성공했지만 혁명은 바로 제2의 혁명을 부른다. 주도세력간의 권력투쟁이다. 젊은 영관급 주체세력들은 혁명 지휘관 바로 곁의 '아우'를 견제한다. 박정희는 한웅진에게 국가재건최고위 내무위원장을 맡기려 했지만 젊은 주체세력들이 비토한다. 이꼴 저꼴 보기 싫었던 한은 두달만에 훌훌히 야전으로 돌아간다. 격한 성정에 형에게 재떨이를 집어 던지며 한마디를 남긴다. "박정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어주겠다"

다음은 황용주의 차례다. 문화방송 사장으로 서울로 올라왔지만 불과 몇달 만에 감옥행이다. '세대'지 필화사건이다. 권력을 굳힌 주체들은 황용주의 낭만적 통일 방안에 대해 반공법을 걸어 박정희의 '친구'를 제거한다. 구상은 고문을 맡아 달라는 박정희의 권유를 뿌리치고 의연히 시인의 길을 간다.
감옥에서 풀려난 황용주나 수년 뒤 현역에서 예편당한 한웅진에게 여생은 그저 무위(無爲)의 나날이었다. 그래도 연 중 하루는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새해 첫날이면 청와대로 들어가 이제는 만나기도 쉽지 않은 옛 친구와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젊은 시절을 같이 했던 유행가도 함께 불렀다.

박정희 최후의 날이 왔다. 이 날 새벽, 구상은 먼저 간 친구를 위해 진혼축(鎭魂祝)을 써내려 간다. 〈국민으로는 열여덟 해나 받든 지도자요/개인으로는 서른 해나 된 오랜 친구(중략)/이 세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 그 장한 의기와 행동력과 질박한 인간성과(중략)/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중략)/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보사/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2001년 8월, 황용주에게도 마지막 날이 왔다. 그는 프랑스에서 달려온 딸 란서의 손을 잡고 외마디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아, 정희야. 아, 란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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