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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남긴 것

김웅희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2017년 11월 14일 00:05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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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국제·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국제기구가 20세기적 갈등의 현장에서 국익 추구를 위한 각축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보편적 가치와 국익이 충돌하는 국제사회에서 국제기구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적 설명이 있다.

강대국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현실주의적 시각과 국가 간 협동을 통한 공동 이득의 추구를 가능하게 한다는 자유주의적 설명이 대립하는 한편, 구성주의는 보편적 이념의 구현체로서 국제기구의 역할에 주목한다.

미국에 이어 이스라엘이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유네스코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국제기구가 주권과 국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국제기구가 초국가적 역할을 수행하기 녹록치 않은 현실은 자유주의나 구성주의적 설명의 한계를 시사한다. 국제기구는 국가가 갹출하는 분담금으로 운영되며 미국과 일본의 분담률이 높다. 유네스코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로 2011년 이후 분담금 납부를 보류해 오다가 급기야 또 탈퇴를 선언했다. 일본 또한 분담금 납부를 국익을 위한 지렛대로 활용하여 '실력행사'를 서슴지 않고 있다.

유네스코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계승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인데도 훼손되거나 영원히 사라질 위험에 있는 기록유산의 보존과 이용을 위하여 기록유산의 목록을 작성하고 효과적인 보존수단을 강구하려고 세계기록유산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10월말 한국, 중국, 일본 등 9개국이 공동으로 신청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에 대해 등록의 가부를 심사하는 국제자문위원회(IAC)의 권고에 따라 등록을 보류하는 결정을 내렸다. IAC가 관계국의 대화를 촉구하기 위해 시기와 장소를 설정하도록 권고했기 때문이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사실관계뿐만 아니라 역사인식에도 관련되어 있어 그 절차가 복잡하게 진행된다. 이번 IAC 심사 및 권고를 앞두고 유네스코는 사실관계나 역사인식에 이견이 있을 경우 당사자 간 대화를 촉구하고 의견이 모아질 때까지 심사를 보류하기로 하는 내용의 제도개혁 결의를 채택했다. 2016년 한중일의 시민단체 등이 일본군 위안부 자료의 등재를 신청하자, 일본은 그동안 매년 납부하던 분담금을 지렛대 삼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 심사 절차의 개혁을 압박한 바 있다. 내년 봄 관련 규정이 정비되면 당사국인 일본과 합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향후 위안부 기록물 등재는 사실상 힘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등재를 신청한 시민단체를 막후에서 지원하거나 IAC가 위안부 기록물에 대해 등재 권고를 하도록 설득과 홍보전을 전개했다. 일본 정부도 등재 저지에 나섰고, 언론까지 가세하여 판세를 일본에게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한다. 이른바 기억을 둘러싼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이번 등재 보류는 유네스코의 위상 약화와 한일관계의 악재로 작용할 소지가 작지 않다.


유네스코의 '대화를 위한 등재 보류 권고' 결정에 대해 한국의 시민단체는 "오늘날 법정도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자와 대화하라'는 주문을 하지 않는데, 국제기구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서 비판을 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분담금을 무기로 위안부 기록물 등재의 총력 저지에 나선 일본이 더 큰 문제지만 선악 이분법적 구도로 이 사건을 이해하는 태도 역시 유네스코의 숭고한 이념과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에 비추어볼 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한편 이번 유네스코의 결정에는 유네스코 본연의 역할이나 한일관계에 긍정적인 시그널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은 알력 속에서 등재가 보류되어 한일관계 갈등의 불씨로 남게 되었지만 등재에 성공한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일체의 기록물은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해 성공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한일관계에 청신호를 켠 의미 있는 사건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한일 양국 정부가 아니라 민간단체가 등재를 주도했다. 한국에서는 부산문화재단, 일본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조직한 조선통신사 연지연락협의회가 주체가 되었다. 양국 단체들은 등재 과정에서 조선통신사 기록물이 '평화'와 '선린외교'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 기록물에 전쟁을 경험했던 양국이 상대를 존중하면서 교류를 이어간 방법과 지혜가 응축되어 있다는 사실관계와 인식의 공유가 유네스코의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조선통신사가 한일관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갈등의 시대를 공존의 시대로 전환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조선통신사 기록물의 등재는 진퇴양난에 빠진 작금의 한일 관계에 경종을 울리고, 관계 복원을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일 역사 갈등의 파고가 높게 일고 있는 와중에 이러한 조선통신사 기록물의 공동 등재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는 행위인 것은 물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의 구축에도 좋은 선례로 작용할 것이다. 등재 과정에서 정부가 아닌 한일 양국의 민간단체가 합심하여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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