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와 봉오동 진출
최진동(1883~1941) 장군이 나고 자란 곳은 함경북도 온성군이다. 본명은 최명록이었으나 항일운동에 뛰어들면서 최진동으로 이름을 바꿨다. 최 장군이 일곱 살이 되던 해인 1890년 가족들과 중국 연변으로 이주했다. 중국인의 양자로 들어간 그는 토지 통역관을 하면서 황무지였던 봉오동 일대를 사들였다. 봉오동은 독립을 양성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군사요충지였다. 최진동은 이때부터 이 곳의 지리·지형을 익히며, 훗날 일본군을 대파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사재를 털어 독립전쟁을 준비
최진동은 조선인 마을을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했다. 이를 통해 돈을 모은 뒤에는 봉오동 학교를 설립해 역사와 지리, 군사훈련에 매진했다. 한편으로는 이동휘 등 독립 운동가들과 교류를 하면서 독립전쟁을 착실히 준비했다. 재산의 일부를 정리해 200여명의 병력을 최신 무기로 무장시켰다. 러시아와 중국군인들을 초빙해 군사훈련도 시켰다.

▲국내 진공작전
1919년 병력을 600명으로 확대한 최진동은 군무도독부(독군부)를 설치했다. 1920년에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과 1천여 명의 연합부대를 편성했다. 이들은 국내진공작전을 펼쳐 압록강 일대의 일본수비대 3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가 봉오동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일대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 곳의 지리에 밝은 최진동은 홍범도, 김좌진 장군과 연합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
1920년 6월,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하자 최진동은 먼저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그런 뒤 독립군 부대를 봉오동 골짜기에 매복시킨 채 일본군을 기다렸다.
일제가 봉오동 골짜기 깊숙이 들어오자 산 정상과 등성에서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이 전투를 통해 일본군 150여명을 사살하고 수많은 무기를 빼앗는데 성공했다.
봉오동에서 전멸하다시피 한 일제는 그해 10월 청산리에서 반격을 가해 왔다. 청산리 전투에서도 총사령관을 맡은 최 장군은 재차의 매복전을 통해 일제를 대파했다. 나라 잃은 설움을 일순 털어내고, 조선 민중의 독립의지를 일깨우기에 충분한 전과였다.

▲중국경찰에 체포
청산리 전투 이후 러시아 땅으로 이동한 최 장군은 오므스크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친일파 암살단의 최고 고문과 독립운동 단체 통합 준비 모임의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으로 돌아온 뒤 군벌의 간첩이라는 오해를 받아 중국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잠시 후 석방되기는 했지만, 그의 고난은 최후까지 이어졌다.

▲일본 헌병의 고문 후유증으로 별세
1940년 독립군 규합을 위해 벌목공을 모집하던 그는 다음해인 1941년 일본헌병에 끌려갔다.
최 장군 소유의 땅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던 일제의 토지 기부 요구에 불응한 대가였다.
모진 고초 끝에 간신히 풀려난 그는 고문의 후유증이 악화돼 그해 11월 별세하고 말았다.
장례는 철저히 일본 헌병에 의해 치러졌고, 시신은 철관에 넣어져 농지 한가운데 묻혔다.
그가 독립군을 지휘해 일본군을 괴멸시켰던 봉오동 한 구석에 버려지듯 매장되고 만 것이다.

▲독립훈장 추서 및 국내 유해 봉환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최 장군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친일전력을 가진 권력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극성으로 곧 잊히고 말았다.
그의 업적이 조금씩 재조명된 것은 한중 국교가 회복된 1992년의 일이다.
2006년 4월에는 봉오동에 묻힌 유해가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와 대전국립 현충원에 안장됐다.
최 장군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동생 최운산 선생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