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엔 사람, 지금은 기계 … '정성'은 매한가지
▲ 선두포는 지금 벼수확철이다. 선두포에선 10월 중순 벼베기를 시작해 10월 말까지 진행한다. 과거엔 농부들이 품앗이를 하며 일일이 낫으로 베었지만 지금은 몇몇 대리농이 콤바인으로 추수를 돕는다. 23일 오후 선두포 농부 이평건(68)씨가 낫으로 벤 벼를 든 채 걸어나오고 있다.
▲ 콤바인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선두포 평야의 벼를 베고 있다. 콤바인이 지나가면서 벼를 베면 쌀알이 기계 안으로 자동적으로 들어가며 지나간 자리는 볏단만 남는다.
햇볕·바람·비, 농부 땀으로 마치는 가을걷이

"영농 현대화도 좋지만 쌀소비 점점 줄어 걱정"



금물결의 바다 한 가운데를 농부가 가로질러 간다. 한 손은 벼포기를 잡고 한 손엔 낫을 든 채 낫질을 하며 나아간다.

"낫이 안 들어." 황금벌판에 얼굴을 파묻고 벼를 베던 농부 이평건(68)씨가 허리를 펴며 말한다. 평야 저쪽으로 고라니 한 마리가 껑충껑충 뛰어간다.

평야 한 켠에선 장갑차처럼 생긴 콤바인이 벼를 집어삼키며 다가오고 있다.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엔 볏단만 남는다. 볏단들은 그대로 남아 거름이 되거나 소농장으로 평당 100원에 팔릴 것이다. 콤바인이 거둔 쌀은 탈곡과 건조, 도정을 거쳐 사람들의 밥상에 오르게 된다.

저 한 줌의 쌀속엔 지난 봄 부터 시작한 농부들의 비지땀과 지극한 정성, 강화도의 바람과 햇살, 비가 응축돼 있다. 벼베기는 이슬을 피한 시간인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 정도까지 진행된다.

수확하는 쌀은 크게 조생종과 만생종으로 나뉘며 고시히카리, 아키바리 등 맛에 따라 6~7종류가 생산된다. 순식간에 평야의 벼를 벤 콤바인이 농로쪽으로 다가오더니 농기계에서 연결한 관을 통해 쌀을 토해낸다. 트럭 짐칸에 있던 800㎏ 쌀포대가 금방 가득찬다.

"배 채우러 갑니다." 콤바인을 부리던 농군이 내리면서 말했다.

70년 전 추수는 수작업으로 이뤄졌다. 남성들은 왼손으로 한 줌의 벼를 움켜쥐고 오른 손에 든 낫으로 벼를 베어냈다. 한 줌의 벼를 베어서는 땅에 내려놓았고 무릎을 구부리지 않는 솜씨가 필요했다.

추수하는 동안 노인들은 사람들 뒤에 정렬해서 3일 동안, 혹은 구름이 끼면 더 오랫동안 벼를 건조하기 위해 가능한 벼를 얇게 펼쳐 놓았다. 비가 오면 즉시 볏단을 만들어야 했다. 농부들은 논두렁길을 따라 볏단을 쌓아 올리는데 닻처럼 네 단을 서로 기대면서 비스듬하게 세웠다. 보통 3~10일 햇볕에 말렸으며 다 말린 것은 남성이나 황소에 의해 집으로 운반됐다.

아이들은 추수 기간에 논에 떨어진 벼를 모아 부모님에게 가져왔다. 부지런한 농부는 논에 남은 잎과 뿌리들이 얼기 전에 쟁기질을 해 비료로 묻었다. 그러나 게으른 농부는 겨울 내내 뿌리들을 그대로 남겨두기도 했다.

농부집안의 하루 일과는 해 뜨기 전에 시작됐다. 아내가 김치, 고추장, 감자를 곁들이 보리밥으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논밭에 별 문제가 없는지 살피러 나갔다.

남자가 논으로 일하러 나간 뒤 아내는 어린아이를 돌본 뒤 밭일을 했다. 점심시간이 되며 식사를 준비해 논에서 일하는 남자들에게 날라다줬다. 아내는 그 뒤 빨랫감을 들고 개울로 갔다. 옷들을 돌 위에 놓고 평평한 방망이로 두드리며 빨래를 했다.

세탁용 풀은 쌀가루로 만들었다. 이 풀로 만들어진 여러 개의 공 모양의 것을 물속에 풀어 하얀 옷가지들을 담갔다가 헹구었다. 태양에 말리면 옷이 오그라들수도 있으므로 그늘에 옷을 말렸다. 빨래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깨끗한 천으로 싸서 묶음을 만들어 밟아 옷을 폈다.

선두포 사람들의 생계는 전적으로 농업에 의지하고 있었다. 벼를 베어 집으로 운반한 뒤 탈곡하는 추수가 끝나면 겨울의 석달 동안은 농사 이외의 일거리에 집중했다.

남성들은 정기적으로 다시 덮어야 할 지붕에 쓸 짚을 엮었다. 짚신, 멍석, 망태기, 바구니 등 다양한 잡동사니를 만들었다. 여성들은 요리를 하거나 바느질을 하는 등 다른 계절과 같은 일을 했다.

겨울은 가장 노동을 적게 하는 시기이자 가장 즐거운 때였다. 곡식들이 저장돼 있고 당분간 먹을거리에 대한 걱정도 없이 새해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농작물중 쌀과 보리는 강화도는 물론 한반도 전체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작물이라고 오스굿은 기록하고 있다. 쌀 보리 다음으로 중요한 작물은 감자, 밀, 기장, 콩, 배추, 무, 고추, 파이었고 세번째로 중요한 작물은 옥수수, 메밀, 순무 등이었다.

70년이 지난 지금 높은 품질의 쌀들은 '강화섬쌀'이란 이름으로 전국으로 나간다. 그러나 쌀소비가 줄면서 농부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심상점 선두2리 이장은 "비료는 드론으로 주고 벼베기는 콤바인으로 하는 등 영농현대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노동력이 축소되는 대신 비용이 많이 들어감에도 수매가가 낮아 농부들이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며 "올해는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쌀을 미리 사들여 준다는데, 앞으로도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쌀농사를 짓는 농부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두포평야 위로 저녁 일몰이 시작됐다. 노을은 만추의 산에 주홍색 덧칠을 해주었다. 이제 막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정족산. 그 산이 더 진하고 환한 빛으로 다가왔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이 본 '선두포 특별기획'은

"광복 직후와 오늘날 '비교' 인상적 … 지역사 참신한 기획 계속되길 기대"


인천일보 창간 29주년 특별기획 '1947 선두포, 강화의 어제와 오늘'이 오늘로써 끝을 맺는다. 이 기획을 진행하는 동안 자문을 해 준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부터 기획의 의미를 들어봤다.

"세계적 인류학자 코넬리어스 오스굿이 인천을 찾았다는 자체가 학문적으로 큰 축복이라 하겠습니다."

조 관장은 "오스굿의 선두포 연구는 인천지역의 사회사, 생활사, 민속사 등을 인류학적 측면에서 기록한 것"이라며 "우리나라에 아직 인류학이라는 학문이 소개되기 전에 그같은 연구가 인천에서 행해진 것은 대단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인천일보가 오스굿과 같은 방법론으로 70년이 지난 오늘 같은 지역을 샘플로 선정해 후속비교한 것은 의미가 큽니다. 아마 지역언론사상 이같은 보도는 처음일 것입니다. 내년에 30주년을 맞는 인천일보의 성숙도를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조 관장은 "광복 직후의 농촌 상황과 오늘날 농촌 상황의 구체적 '비교'를 보는 것은 아주 큰 즐거움이었다"며 "오스굿이 관찰 조사해서 기록한 1947년 당시 선두리 지역 공동체의 여러 특징과 의·식·주를 위시한 농경 생활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얼마 전에 직접적 연관이 있는 이상복 강화군수님을 만났는데 큰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이 선두포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것도 인천일보 보도의 중요성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앞으로도 인천일보가 지역사 연구에 신기원을 열어젖힐 참신한 기획으로 독자들과 시민들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