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조진현 칼럼-골프 읽어주는 남자] 골프 도사, 일만 시간이면 된다

 前 SBS골프채널 MBC-ESPN 골프해설위원

2017년 10월 20일 00:05 금요일
760287_290124_4115.jpg

평생 공부가 지지리도 싫었고 공부도 잘 못하던 나. 이십년 전 마흔의 나이에 잘 나가던 대기업 간부 자릴 박차고 간이 잔뜩 부은 채 덥석 나선 미국 골프 학교 유학길. 지금은 골프아카데미 오브 아메리카로 학교명이 바뀐 샌디에고 골프스쿨이었다. 당시가 외환위기 시절이어서 돈도 넉넉하지 않은 상태로 미국을 향했고 가족까지 동반했다. 밖에 나가기만 하면 돈 드는 일 투성이라 동반한 처자식 고생시킬까 봐 늦은 나이에 돈 안 쓰는 게 버는 길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열심히 공부나 하자고 생각했지만 넉넉지 않은 경제 사정에 마침내 아내를 현지인이 운영하는 빵집 아르바이트 자리로 내 몰고야 말았다. 그래서인지 정말 내 평생에 이렇게 열심히 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불철주야 공부에만 열중했다. 남이 보면 골프스쿨이니 매일 골프나 쳤겠지 생각하지만 커다란 오산이다. 일반 대학과 똑같은 커리큘럼에 골프과목이 추가되어 코피가 터질 정도로 밤샘 공부를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졸업을 몇 주 앞두고 한국서 불쑥 찾아 온 큰 처남과의 술자리. 나름 가족 간 의리 지킨답시고 다음 날 시험이 있다는 것도 함구한 채 누가 이기나 식의 술 대항전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속으로는 잠시 눈 좀 붙인 뒤 마지막 시험과목을 좀 훑어 볼 생각이었다. 시험과목은 누워서 떡먹기 정도로 생각했던 '골프룰'. 그러나 아뿔사, 결국 잠이 깊이 들어 시험시간을 놓쳐버렸다. 아내로부터 시험 있다고 왜 말 안 했느냐는 핀잔만 실컷 듣고 급히 학교를 향했다.

특히 이 과목은 내가 가장 재미있게 들었고 유학 중 틈틈이 시간을 내어 미국골프협회에서 시행했던 룰 심판 자격 과정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과목이었다. 정이 들대로 든 과목이어서 자심감이 충만한 전략 과목이었다. 핑계가 통하지 않고 재시험도 불가한 상황. 그저 하늘이 노랗게 보일 뿐이었다. 룰만큼이나 학사규정과 규율에 엄격했던 골프 룰 선생님. 마침 자기 할머니가 한국인이어서 자기에게도 한국인의 피가 1/4 이 섞여 있다며 쉬는 시간에 나누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선생님이 가장 좋아 한다던 김밥과 잡채를 댁으로 수차례 가져가고 아양에 아양을 떨어 결국 놓친 시험을 에세이로 대체하고서야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지금 그 졸업장 한쪽 구석엔 마치 주홍글씨인 양 빨간 리본이 붙어 있다. '영예의 졸업생'의 표식이다. 골프 룰 B 학점만 빼고 나머지 전 과목에서 올 A를 받았다. 졸업 평균 평점을 4.0 만점에 3.87을 받았다. 하마터면 A+가 없는 미국에서 나 같은 게으름뱅이가 모조리 A 학점을 받을 뻔 했다.

졸업한 지 거의 이십년이 다 돼가는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그 골칫거리이자 유일하게 A 학점을 못 받은 룰 과목이 어엿한 나의 밥벌이 메뉴가 돼 있다. 프로연수와 학교강의, 기업체 강연 등에서 그 딱딱한 룰을 재미있게 해설해 주는 사이 나는 어느새 골프 룰 유명강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골프 룰 집을 항상 내 곁 가까이 두고 다닌다. 룰은 골프 치는 것 이상 까다롭고 복잡하다. 룰 집 자체는 두께가 얇지만 규정 34개 조와 그 부속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원칙과 논리가 스며 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형평'의 원칙이다.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이성과 합리주의가 바탕이다. 그 바탕에서 해석하고 각 상황을 원칙과 원리로 엮어 가면 의외로 쉬운 답이 보인다. 아마도 이 룰 집을 백번 이상은 읽은 듯하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골프가 다른 스포츠와 차이나는 것은 경기장이 일정 규격이 없고 같은 코스라도 칠 때마다 별의별 상황이 다 생긴다. 그래서 수도 없이 발생하는 애매한 상황을 간단한 룰집으로 포괄하기는 부족하다. 해석이 모호한 것은 별도로 약 천여 개의 사례집을 모아놓은 재정집( decision book)에 의존한다. 이 책 역시 적어도 열 번이상은 완독한 듯하다. 그동안 각종 강의와 강연에서 인연을 맺은 학생들이 수시로 내게 자신들이 필드에서 경험한 아리송한 사례의 해석을 타진해 온다. 어떤 경우라도 나는 줄줄이 사탕처럼 달콤하게 답을 해 준다.

누군가 어느 분야에 통달하려면 만 시간을 투자하라 했다. 하루에 한 시간이면 삼십년이 걸리고 세 시간이면 십년이 걸리고 열 시간이면 삼년이 걸리는 계산이다. 골프도 이 논리처럼 만 시간을 들이면 도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골프룰만큼은 만 시간 이상의 노력을 한 듯하다. 룰이 밥 먹여 주냐고들 많이 항변한다. 그렇다 나의 경우 룰이 밥 먹여 준다. 그래서 나는 자칭 룰 도사라 자처하지만 인생만큼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이 산술 법도 인생살이에까지 딱 들어맞지는 않는 듯하다.
<저작권자 ⓒ 인천일보 (http://www.incheonilbo.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태그 인천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