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대 이주' 역사의 시작 … 미지의 세계 향한 '첫 발'
▲ 1902년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첫 하와이 이민자부터 1905년 마지막 공식 이민이 끝날 때까지 64회에 걸쳐 약 7415명이 하와이 이민을 떠났다. 이민자들은 첫 이민선 갤릭호를 비롯해 아메리카 마루(America Maru), 차이나(China) 등 모두 11척을 이용했다. 갤릭호는 1885년 아일랜드에서 건조된 4206t 규모의 배다. 모두 6회에 걸쳐 이민자를 수송했다. /사진제공=한국이민사박물관
▲ 목걸이 신분증 '방고'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이 목에 걸고 다녔던 속칭 '방고'. 방고란 번호의 일본식 발음으로 알루미늄 번호표는 이름을 대신했다.
▲ 한지 여권 '집조' 가로 29.3㎝, 세로 32.8㎝ 크기의 한지로 만든 여권. 한 장을 좌우로 나눠 한글과 영어, 불어로 여행자와 보증인의 인적사항 등을 적었다.

1902년 이민 1진 제물포항 출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투입
조국 독립운동자금 조달
광복 후 거액기부 … 인하대 세워
코리안 디아스포라 염원 실현


근대의 바다, 인천의 바다는 새로운 도전의 출발지였다. 서구 열강이 침투해 왔던 그 바닷길을 거슬러 올라 미국과 일본, 멕시코 등으로 이민을 떠났기 때문이다. 정부가 인정한 한민족 대 이주의 역사는 인천 제물포항에서부터 시작된다. 개화의 여명기였던 1902년 제물포항에서 어린이를 포함, 한인 121명이 일본을 거쳐 미국 하와이로 출발한 것이다.

앞서 1860년대 농민, 노동자들이 가뭄과 굶주림을 피해서 국경을 넘어 연해주나 북간도 등 중국, 러시아로 떠난 이주는 유이민(流移民) 성격이기에 공식 이민과는 구분된다.

인천 제물포는 바다건너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의 출발지였고, 이민자들이 마지막으로 밟은 조국의 땅이다. 위정자들에게 바다는 두렵고 위험했지만, 백성들에겐 삶터이자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였다.

이민자들은 언어소통과 인종차별, 저임금, 불볕더위에 시달리는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갔다. 초기 이민자들은 대부분 인천 내리교회 교인과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의 도전과 지난한 삶을 되돌아 본다.


▲첫 이민선, 갤릭호를 타기까지

인천 제물포는 새로운 도전의 첫 발 내 디딘, 공식 이민의 출발지다. 1902년 12월22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 121명이 여권(집조)을 갖고 제물포항에서 일본을 거쳐 미국 하와이로 출발했다. 그들이 첫 한민족 이주 노동자들이다. 이후 1905년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64회에 걸쳐 7415명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하와이 이민을 떠났다.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은 여객선 겐카이마루(玄海丸)를 타고 이틀 동안 항해 끝에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첫 이민선, 태평양 횡단 기선 갤릭(S.S. Gaelic)호로 갈아타기 위해서다. 이민자들은 겨울을 이겨낼 솜바지 등을 겹겹이 껴입은 채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에 도착, 검역소에서 신체검사와 예방접종 과정에서 19명이 탈락하고 102명만이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13일 목적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미국 보건당국의 검사결과 질병자 16명이 탈락해 86명(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이 상륙허가를 받았다. 인천을 떠난지 21일만이다. 하와이 이민 제1진이다. 이들은 검역과 입국 절차를 마치고 협궤 열차를 타고 오아후 섬 와이알루아(Waialua) 농장 모쿨레이아(Mokuleia)에서 본격적인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공식 인력 송출, 하와이 이민

19세기 후반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농장이 본격 조성되면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다. 초기 농장 노동력은 원주민이었으나 기대에 못미쳐 중국(1852년)과 일본(1868년)에 이어 한국 이민 노동자들을 선택했다.

주한 미국공사 알렌(H.N.Allen)이 하와이 이민 주선을, 데쉴러(D.W.Deshler)가 이민자 모집공고와 송출 등 업무총괄을, 인천 내리교회 존스(G.H.Jones)목사가 교인들에게 이민을 설득·권유했다. 특히, 이민사업 책임자로 임명된 데쉴러는 이민모집을 위해 내리교회 부근에 동서개발회사와 이민자의 재정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한 데쉴러 은행(Deshler Bank)을 설립했다.

알렌은 고종에게 "좀 더 잘살게 해주기 위해 하와이로 보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이주자들은 여권발급과 의료검진, 뱃삯에 필요한 비용 100달러 가량의 금액을 데슐러 은행에서 대출받았다. 대출 형식이지만 하와이 농장주가 계약을 통해 제공했기에 다시 돌아오려고 해도 비싼 뱃삯 때문에 거의 불가능 했다.

하와이 첫 이민자 121명은 거주지별로 보면, 제물포·부평·강화 등 오늘날 인천 출신이 86명(84%)으로 가장 많았다. 대부분 인천 내리교회 교인과 인천항 노무자들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한인 공동체의 구심점이자 초기 이민자들의 안식처였다.

그들은 유민원(당시 여권발급 등 이민 관련 업무를 담당한 정부의 공식 기관)에서 발급한 집조(執照·여권)를 갖고 떠났다. 대한제국이 처음 추진한 공식 인력 송출이었다. 하와이 이민을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이민으로 간주한 이유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생활

"우리는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여독을 풀 새도 없이 곧 바로 농장작업에 투입됐다. 우리는 참을 수 없이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눈물로 세월을 보냈고, 하늘을 보며 고향을 생각했다"고 한인 이주자들은 초기 시절을 회상했다.

1905년 하와이에는 65개 농장에 한인노동자 5000여명이 있었다. 결혼한 부부에게는 작은 정원이 있는 통나무집을 제공하고, 독신 남자들은 긴 기숙사식 건물에 서너 명씩 살았다.

이들 이민 1세대들이 농장에서 하는 일은 잡초뽑는 일, 수확때 줄기를 자르는 일, 이파리를 잘라내고 차곡차곡 쌓아 놓는 일, 물 대는 일이었다. 이중 힘든 일은 쌓아놓은 사탕수수를 등에 지고 기차나 마차에 싣는 것이었다.

그들은 새벽 4시 기상 사이렌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아침식사 후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하루 10시간씩 사탕수수 농장에서 중노동을 했다. 일요일은 쉬었다.

'루나'(하와이 말로 십장)들은 채찍을 들었고, 이름 대신 방고라는 신분증에 적힌 번호로 불렀다. 월급은 한 달에 17달러 정도지만 식비로 봉급의 반을 공제하고, 노동 속도나 내용이 맘에 들지 않으면 벌금을 징수해 한달에 고작 2~3달러만 손에 쥘 수 있었다. 여자나 소년들은 하루에 50센트 정도였다. 심한 경우 오히려 농장주에게 빚을 지기도 했다.

사탕수수농장의 고된 저임금 노동에 시달린 한인들이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의 농업과 철도 노동자 등으로 다시 이주해 갔다. 낯선 환경과 고된 노동이지만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힘들게 번 돈을 기꺼이 내놓았다.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 관장은 <인천이야기 100장면>에서 "이민 1세대들이 분연히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면서 "그들이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공채를 발행한 것은 독립운동사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하와이와 중국 등지에서 펼쳤던 독립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이민자들은 광복이 되자 이민의 출발지요, 고향인 인천에 2세 교육을 위해 수십만 불의 거액을 보내 인천(仁川)과 하와이(荷蛙伊)의 첫 자를 딴 '인하(仁荷)대학교'를 1954년 건립,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염원을 실현했다.

인천 월미도에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있는데, 인천시가 2008년 선조들의 해외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오늘을 사는 이민의 후손과 국내인을 하나로 연결하는 한민족공동체의 실제적인 귀환을 구현하는 장소다.

하와이 이민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농민과 노동자들은 만주나 일본 등지로 떠났고,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다. 6·25전쟁 이후에는 전쟁고아 입양이나 미군결혼 이민이 이뤄졌다.

1962년 해외 이주법이 제정된 이후 취업이민이나 농업 이민 등 세계 각국으로 다양한 이민의 길을 떠났다. 현재 전 세계 17여개국에 약 700만명의 해외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 사진결혼과 사진신부 이야기

달랑 '사진 한 장' 들고 신랑 찾아 하와이로 간 700명의 신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 7415명이 애환을 극복하고 미국사회에 뿌리내리는데 걸림돌이 하나 생겼다. 혼기를 훌쩍 넘긴 노총각들의 결혼문제였다.

이주자 대부분 20세 전후의 젊은 미혼 남성이었다. 남성이 여성보다 10배 많았으며, 아이가 전체 7%를 차지했다. 이들은 현지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궁여지책이 사진결혼이었다. 미국 이주당국은 한인 남성과 결혼을 희망하는 한인 여성들에게 미국 이주를 허가했는데, 이를 사진신부(picture bride)라고 불렀다.

고국 처자와 하와이 이민 총각이 사진만 보고 결혼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신랑과 신부 나이 차이가 평균 15살이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쟁이를 통해 사진 신부 700여명이 결혼하기 위해 신랑 될 사람의 사진 한 장을 들고 하와이로 건너갔다. 비로소 본격적인 초기 한인사회가 형성됐으며, 사진신부들도 개척자로서 강인하고 적극적인 삶을 꾸려갔다.

사진신부는 초기 한인 이주자들이 가정을 이루고 2세를 낳아 한인 공동체를 구성, 발전시켜나가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렇게 한인 사회가 성장하면서 2세들은 새로운 문화와 융합해 나갔고 점차 미국사회 일원으로 뿌리내렸다.

/글·사진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