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년 글자 역사 앞에서 아직도 배울게 많은 삼십년 서예인생
▲ 심은 전정우 선생作 '세계관문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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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으로 담는 글씨 재미에 10여년의 직장 생활 그만두고 입문
9년간 매일 천자문 쓰며 세계 최초 120가지 서체 완성하기도
모교인 강화 강후초 폐교 자리에 미술관 꾸며 서예 가치 알려
"옛 것, 새 시대에 맞는 예술로 녹여 글자 역사 이어나갈 것"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다. 이 정신으로 30년 넘게 먹을 갈며 '서예인생'을 살고 있는 선생이 있다.

이 선생은 지난 2004년부터 10년간의 길고도 질긴 작업을 통해 세계 최초로 120가지 서체로 천자문 720종을 완성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자신의 호를 따 다양한 서체를 합쳐 조화를 이룬 '심은체'를 만들기도 했다.

또 폐교를 미술관으로 꾸며 17년째 자신의 작품을 알리는 동시에 지역의 소중한 문화공간으로 가꾸고 있다.

인천 강화도가 낳은 심은 전정우(68) 선생이 지난해 인천 문화상 수상에 이어 고희를 앞두고 오는 24일 오후5시 개막식을 시작으로 30일까지 인천문화예술회관 대·중전시실에서 '유예자여(遊藝自如)'전을 연다.

그동안 8차례 개인전을 열었지만 정작 고향 인천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전시라 기대 반 설렘 반이라는 그다.
심은 선생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는데, 유난히 글쓰기와 서예에 특출했다.

"당시 각 반에 걸린 시간표와 급훈은 다 내가 직접 썼던 것들이었어요. 교무실과 교장실 안내문까지 학교 구석구석 내 손을 거치지 않은 문구들이 없었죠."

학창시절 전국서예대회에서 각종 상을 받는 등 두각을 나타내던 그는 여건상 취직에 유리한 전공을 배워 기술공으로 11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시 붓을 잡고 싶다'는 생각에 사표를 내던졌다.

이후 서예 대가 여초 고(故)김응현 선생으로부터 6개월간 사사받은 뒤,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 부문에서 노자백서 갑·을본 서체로 대상을 받으며 본격 서예의 길로 들어섰다.

"그냥 서예가 너무 재밌었어요. 붓끝을 따라 그려지는 선 하나에도 아름다움이 오롯이 묻어있는 게 눈에 보여 신이 나 그린 게 30년이 넘었네요."

이후 2000년 9월부터 폐교가 된 강화 강후초등학교를 '심은미술관'으로 꾸며 자신의 수많은 작품을 전시 중인 심은 선생. 강후초 1회 졸업생으로서 모교를 그리워하고 서예를 애정하는 마음으로 매년 사비를 들여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미술관 부지 소유주인 시교육청이 땅 매각을 추진하고 있어 비워줘야 하기에 그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그는 "우선은 이달 말까지 임대를 연장했지만 빨리 비워달라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며 "17년간 매년 임대료를 내며 열심히 꾸려왔는데 사실 부담도 되고 여러모로 막막하다"고 털어놨다. 이어 "인천 시민, 국내 서예가보다도 중국 관광객들이 더 놀라고 갈 정도로 가치 있는 곳인데 많은 분들의 관심이 절실하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심은체'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전시회가 될 거에요." 이번 전시에선 심은 120체 720종 천자문 중 일부와 농필천자문, 미래서 작품들, 천자유희 작품 등 총 200여 점을 소개한다.

단연 주목할 만한 작품은 심은체로 쓴 천자문. '심은 120체'는 중국의 갑골·화폐, 한국의 광개토왕비, 백제 무령왕릉지석 등에 새겨진 문자에서 따온 것으로, 왕희지·구양순·조맹부 등 중국 당대 최고 문인과 최치원·한석봉 등 신라와 조선 문인의 서체들도 있다.

그는 서체들을 익히기 위해 처음 쓴 초고 천자문부터 세필 천자문(70x70㎝ 크기에 천자문을 쓴 것), 대자천자문(35x9200㎝), 화첩천자문(40x1100㎝) 등 6종류를 120가지 서체로 써 천자문 720종을 완성했다.

심은 선생은 "실력 있는 서예가라도 같은 글자를 새끼손톱만하게 한번 쓰고, 손바닥 만하게 다시 쓰는 등 크기별로 다양하게 글씨를 쓰는 건 쉽지않다"며 "9년간 매일 천자문을 쓰면서도 포기하고 싶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즐겁고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

일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를 앞둔 심은 선생이지만 늘 서예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고민한다는 그. 3000년의 역사를 품은, 어찌보면 '고리타분'한 분야지만 현 시대에 맞는 감각을 녹여 새로운 예술로 지금 세대들에게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31년 째 서울 종로 '심은 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끊임없이 자기발전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서예가 난해한 분야였어요. 앞으로는 쓰는 서예보다 '보는' 서예로 거듭날 수 있도록 붓끝에 법고창신 정신을 담아 한 자, 한 자 소신껏 써내려갈 계획입니다."

/글·사진 송유진 기자 uzi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