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예총 사무처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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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더웠던 여름, 열대야에 잠을 못 이루고 설쳤던 날들이 바로 엊그젠데 불과 열흘 사이에 기승을 부리던 여름의 열기는 없어졌다. 발 아래로 떨어지는 낙엽과 옷깃을 파고드는 약간의 한(寒)기로 정말 가을이 왔음을 실감한다. 도시의 가로수도 움츠린 것 같고 바람의 빛깔은 얼마 전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잘 익은 감빛을 닮아가고 찬기를 동반한 바람이 주위를 맴도는가 싶다.

바람의 빛깔이 사람들에게 참으로 예민한가 보다. 소리도 없이 스며들기 때문일까. 계절이라는 것은 간극인가 싶은데도 사람들을 공허하게 몰아간다. 속이 텅 빈 것 같기도 하며 사위를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이 혼자인 것만 같다.

자꾸 부딪히는 것이 있다면 떠나간 것들과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라진 모두는 사람들에게 슬픔과 그리운 감정의 대상으로 '추억'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저장된다. 추억의 창고에 쌓인 것은 많다. 어린 시절 궁핍에서 얻어진 먹을거리며 넓은 운동장 모퉁이 녹슨 철봉대와 그네 같은 것들이 추억의 창고에서 걸어 나온다.

추억의 저편 모든 이의 기억에서 영생을 얻으며 간 사람들인데도 살아있는 것 같은 이들도 있다. 김광석과 몇몇 대중 속에서 부비고 산 가수들이 그렇고 시인으로는 윤동주, 그리고 이육사가 그렇다.

사계(四季)의 끝 계절을 만드는 이 가을을 닮은 생을 살다간 시인, 시 몇 편 외에는 추억으로 남지 못한 이가 더 있다면 백석이다. 시와 삶에 대한 관심은 동 시대를 살았던 윤동주에 비하여 그리 큰 관심을 표출하지 못한 것이 사실인가 싶다. 바람 불어와 쓸쓸한 내 마음 줄 곳 없는 이 적막의 계절, 그의 시를 머리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가며 젖어보는 것이 사색의 계절에 할 일인가 싶다.

처음부터 우리말 소설이었던 것 같은 감각적인 생동감, 게다가(번역의) 속도와 양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백석(1912~1996)이 문단에 등장한 것은 시가 아니라 소설을 통해서였다. 19살 젊은 나이에 신춘문예에 첫 발을 내딛었다.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짙은 반면 시의 세계로 눈을 돌리며 소설에서의 어두운 면면은 사라지고 함축과 은유를 주로 하는 시의 특징이 또 다른 백석을 탄생케 한 것이다. 하나 광복과 더불어 고향(정주)에 남은 백석은 자유롭게 작품을 발표하지 못함으로써 예술성보다는 사상성을 강조하는 체제와의 불화 속에서 시인의 차선(次善)은 번역이 되고 말았다.

1940년 토머스하디의 '테스'를 시작으로 17년간 4편의 장편, 단편 1권, 중편 동화집 1권, 단편 2편과 현대시 197편, 동화시를 포함해 208편을 번역하게 되니 이는 평생을 해도 넘치는 양이 아닐 수 없다.

200자 원고지 4618장에 달하는 러시아작가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번역하면서 이국적인 곳의 과거 이야기임에도 우리말 소설이었던 것 같은 감각적 생동감을 자아나게 한 번역의 힘은 바로 시적영감의 산물에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번역에서의 생경한 관념과 개념적 표현 대신에 사물의 상태와 움직임을 적실하게 드러내는 백석만의 어휘들을 찾아 쓰고자 하는 노력이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1935년부터 1948년까지 백석 시의 작품을 정본과 원본을 함께 정리한 그의 시집을 필자가 구입한 해는 2007년(문학동네, 고형진 엮음)이다. 지방의 방언을 가장 적절하게 풀어놓은 백석 시집으로 나름 귀한 책이다.

백석은 방언 이외 고어(古語)를 사용했지만 지역의 조형지물마저 묘사하고 있어 감칠맛이 살아 있는 시가 아닌가 한다. 그의 대표 시 <정주성(定州城)>을 포함해 시집 <사슴>에서 잘 살아 있지만 시 <통영>에서 그 맛을 한층 더 살린 것 같다.

'떠다니는 이야기인가' 하는 말로는 통영에 사모하던 여인이 있어 <통영>이란 시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말은 사실인가 싶다. 남행시초(南行詩抄) <통영>을 들여다 보면 어느 누구도 읊어내지 못한 사랑이 영글어 있다.

왜일까. 통영을 가자면 인천을 한 번쯤 들려 가면 좋으련만, 항구의 불빛과 신문물이 넘실대며 이별이 있고 만남이 있어 한층 젊음의 시인 백석을 현혹시킬 이유가 충만한데 왜 이 땅은 비켜 갔을까.

외모와 학식을 고루 갖춘 당대 최고의 모던보이 백석의 친구인 시인 김기림은 인천을 위한 시도 있건만 그는 왜 인천을 외면했을까. 정말 아쉽다.

누구든 슬픈 시대의 비극을 비껴갈 수는 없었겠지만 30여년의 식민 탄압이 최고조에 이를 때 백석은 시에 몰두하기 위하여 만주로 유랑하고, 그 후 평북의 집단 농장에서 생을 마감한 지 21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의 시는 이 가을 모두의 가슴에 쌓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