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오면 도종환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가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지난 주말 인천대공원을 찾았다가 산책로에 붙여진 시 '바람이 오면'을 보았다. 그날은 가을바람이 쓸쓸히 불던 날이었고, 몇 잎의 낙엽이 흩날리는 저물녘이어서, 아련한 지난 날이 떠올랐다.
젊은 날 나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지 못해 많이 아팠다. 장석남의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으나, 나의 기도는 더 아픈 그리움의 환부를 남기며 내 휑한 가슴에 상처만 덧대고 말았다. 그때 이후 늘 가슴이 시렸다. 정말 돌아볼수록 그리움은 내 빼어난 아픈 절친이었다. 그 시절 '바람이 불면'을 알았더라면 좀 더 아픔이 덜 했을까?
그러나 그것이 어찌 나만의 일이겠는가. 저 이름 없는 들꽃들도 누군가가 그리워 저리 외로이 피어나 흔들리고 있는 것을. 이제는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버려두는 삶을 살아보고 싶기도 한데, 과연 태생적 환부가 아물지는 심히 의문이다.
류시화가 말했듯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는 말은 과연 인생사 지당한 명구일 것이나, 신경림의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이 없'을 리 없고, 박범신의 '청춘이 賞이 아니듯, 늙은이의 그리움' 또한 죄는 아닐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문화관광부장관에 오르기 수년 전 강연차 인천에 왔다가 박촌동 어느 한식당에서 만나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는데, '접시꽃 당신'과의 아픈 이별 이후 정말 그리움도 없는 사람처럼 下心을 보여준 기억이 새롭다.
우리들 사랑하는 가을이 또 깊어가고 있다. 정말 이 가을에는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 되어 깊은 잠이라도 오래 푹 자고픈데…. 글쎄, 무덤까지 쫓아올 것 같은 질기디질긴 독한 놈이 날 놔줄른지? /권영준 시인, 인천부개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