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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택 칼럼] 대한제국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2017년 09월 13일 00:05 수요일
▲ 덕수궁
조선왕조 5백년은 사대조공 체제라는 굴레에 얽매였음에도 스스로 구속된 상태를 느끼지 못하다가 왕과 세자의 책봉을 받으러 갈 때 그리고 남의 나라 연호(年號)를 써야만 하는 갈등에서 우리가 완전한 자유 속에 사는 삶이 아니고 독립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굴레를 느슨하게 하여 통제한다는 중국의 기미정책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개탄하고 이런 모순을 극복하고 싶어 했던 임제(林悌, 1549~1587)는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이 슬피 통곡하자 "세상 어디에도 자기 주군을 황제라 칭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이를 행하지 못했다.

이러한 나라에 살다 가는데 죽는 것을 애석해 할 것 없다"며 곡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기록되어 있다. 임제의 묘는 나주시 신걸산(信傑山) 기슭에 있고 영산강 주변에 있는 사우(祠宇) 앞의 큰 돌에는 임제가 죽음 앞에서 절규한 말이 새겨져 있다.

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 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
(白湖 先生 臨終誡子 勿哭辭)

해질 무렵의 석양이 더 붉고 아름다운 것처럼 조선왕조도 5백여년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자기 모습을 찾았다. 1895년 을미년(乙未年)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를 살해하고 조정을 지키는 충신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것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하지만 사실대로 기록하면 을미왜란(乙未倭亂)이다. 경복궁은 일본군 천하가 되고 고종의 위치가 포로와 같은 상황이 되어 생명마저 위협받게 되니 러시아 공사 베베르(Waber)와 협의하고 러시아 황제의 동의를 구해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니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이는 어쩌면 아관망명이라고 해야 옳다.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은 유생과 친일 세력은 반대했으나 백성은 러시아 공사관에 몰려가 고종과 세자가 살아 나왔다는 사실에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당시 각국 공사들은 자기 나라에 조선은 곧 일본에 패망한다고 보고했다는 기록이 후일 밝혀졌는데, 당시 조정과 고종의 위기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이듬해(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온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외국 공사관이 밀집해 있는 경운궁(慶運宮, 오늘의 덕수궁)으로 들어가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대한(大韓)이란 국호(國號)의 유래

1897년 10월12일, 황룡포(黃龍袍)를 입고 소공동에 조성된 환구단에서 역대 조상에게 나라의 상황을 고하고 황제에 오른다. 지금도 조선호텔 뒤뜰에 환구단이 있지만, 주변을 일인들이 헐고 축소시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먼저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이라고 새로 정한 고종의 논지는 이렇다.

"조선은 기자(箕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는 합당하지 않다. 대한이란 이름을 살펴보면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이런 이름을 쓴 적이 없다. 한(韓)이란 이름은 우리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 우리나라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등 원래의 삼한을 아우른 것이니 큰 이름이 적합하다."

다시 말해 원래 마한, 변한, 진한 등 삼한을 통합하였으니 큰 나라 대한(大韓)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뜻이다. 당시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광무 원년 10월12일은 조선사기에서 몇 만년을 지나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일이다. 조선이 몇천년을 왕국으로 지내며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 대접을 받고 청국의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았는데 이제 대군주 폐하께서 조선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위에 나아가셨으니 그날부터 조선은 다만 자주독립국뿐만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다. 어찌 조선인민이 되어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오."

황제 즉위식 다음날인 12월13일 고종 황제는 경운궁 어전회의에서 국호를 대한이라고 개정하여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황제가 국호를 직접 결정했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했다. 이때부터 대한제국은 비로소 하늘과 시간, 계절 그리고 기록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탄생한지 13년만인 1910년 조종(弔鐘)이 울렸다.

◆대한민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청나라가 이기리라고 판단한 것은 고종과 당시 조정만이 아니었다. 일본이 아무리 힘이 있다 하더라도 대국인 청국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고 예측한 것은 당시의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러일전쟁(1904~1905)도 마찬가지였다. 예상과 달리 두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으니 정부는 계속 패전하는 나라 편에 선 셈이었다. 그것이 대한제국의 한계이며 결국 나라의 운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망한 나라 대한제국이라고 해서 버릴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고 천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고종이 대한이라고 정한 국호는 상해에서 설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계승되었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뿐인가. 36년간 일제 치하에서 활동한 애국독립단체들 중 상당수는 대한이라는 국호를 애용했다. 예를 들어 1906년에 조직된 애국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 1907년에 설립된 국립의료기관 대한의원, 1910년 미국에서 조직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1919년 만주에서 설립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며 홈범도(洪範圖)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 1922년 만주에서 조직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등등은 모두 '대한'이란 이름을 내걸었다.

이 근래 대한민국 건국을 1919년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로 해야 한다는 주장과 1948년 정부 수립으로 해야 한다는 기점 논쟁이 일고 있다. '건국'은 '없던 나라를 세운다'는 뜻이지만, '광복'은 이전에 잃었던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처음부터 힘 있고 찬란한 제국으로 시작한 곳은 없다. 지중해를 제패한 로마제국도 BC 8세기경 로마를 건국한 사람은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Romulus)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환인(桓因), 환인천왕(桓因天王)으로 이어지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이 건국했다고 해서 개천절(開天節)을 기념하고 있는데 또 무슨 건국인가! 대한이란 국호를 사용한 정부만 해도 1897년 대한제국, 1919년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1945년 대한민국에 이른다. 1919년, 1948년보다 역사가 깊은 1897년의 대한제국은 어째서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나라가 망했다고 그 뜻마저 버릴 수는 없다

세계 어느 나라든 초라하게 시작한 처음을 기원으로 삼는데 하물며 힘들게 나라를 만들고 세워온 우리의 과거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 대한제국은 5백여 년의 굴레에서 벗어난 독립국가의 상징이다. 국권을 빼앗겼다고 해서 그 뜻마저 저버릴 수는 없다.

대한민국이란 한 국가의 성립은 어느 특정 시점에 외세에 의해 주어진 독립으로 간단하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에 걸쳐 피땀을 흘리며 성취한 역사적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1948년 정부 수립보다 앞서 1897년의 대한제국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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