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인천수협 조합장

'호룡곡산, 국사봉 넘어온 붉은 해가/ 실미도를 품에 안고/ 바다 속에 잠든다/ 일천구백칠십일년 팔월이십삼일 새벽~/ 곤히 자다 저승길 떠난/ 원혼맺힌 영혼들이/ 핏빛 저녁노을 되어/ 그리운 사람들 보고파 하네/ 실미도…/ 한많은 사연 간직한 너의 모습이/ 너무나 아련하구나'

1971년 8월23일 새벽 "따다당, 뚜르르, 탕 탕" 실미도에서 총소리가 30분 이상 울렸다. 놀라 잠을 깬 주민들은 흔히 하는 새벽훈련이라고 생각했다. 아침 7시쯤 훈련병(죄수) 3명이 정복차림에 완전무장을 하고 마을로 넘어와서 당시 이장(최정철·사망)에게 부대장이 맹장에 걸린 것 같아 인천본부로 후송해야 하는데 경비정이 기관고장으로 운항할 수 없으니 마을어선을 징발하겠다고 했다. 내가 이들 3명을 어선(영복호)에 태워 실미도에 도착하니 중무장을 한 훈련병 20여명이 우르르 배에 오른다. 하지만 정작 부대장과 기관병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음력으로 7월3일이었던 이날은 백중사리로 1년 중 바닷물이 최고로 높은데다 거센 바람에 파도마저 거칠어 3t짜리 작은 배로 중무장한 장병 20여 명을 태우고 인천까지 가기는 어려웠다. 마침 장봉도에서 새우젓을 싣고 오던 순복호(10t으로 영복호보다 꽤 컸다)가 접안하려 하자 군인들은 이 배로 옮겨타고 오전 10시쯤 인천 송도갯벌에 도착했다. 오전 11쯤 이장께서 실미부대에 변고가 생긴 것 같다고 해 인천경찰서 무의지소 고모 순경(82세·생존)과 본인을 포함한 몇 명이 카빈총 1자루와 45구경 권총을 소지한 채 실미도로 건너갔다. 경비초소 앞에 이르자 3명의 기관병이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아! 반란이다"고 판단한 우리는 즉시 인천경찰서를 호출했다. "임진강~ 임진강, 스탠, 내숭." 당시 인천경찰서 호출부호는 임진강, 무의초소는 내숭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실미부대의 난동사건을 급박하게 알렸던 것이다.

처음에는 무장공비 출몰로 추측한 방송이 나왔으나 우리의 정확한 보고를 받고 실미부대 난동사건으로 밝혀졌다. 이 때 있었던 일을 토대로 제작된 영화 '실미도'는 1000만 관객을 동원한 공전의 히트작이었다. 영화를 본 대다수 사람들은 "내용이 사실인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역사적 진실인듯…." 그러나 현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사실과 전혀 다른, 왜곡되고 미화한 소설 같은 작품이다. 실미부대가 있었던 3년간 많은 사건이 일어났고 그 동안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애환, 드러나지 않은 일은 무수히 많다. 늦었지만 46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사실을 명백히 밝혀 어두운 과거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야 국가를 위해 병역의 신성한 의무를 하다 곤히 잠든 새벽에 날벼락을 맞고 희생된 젊은 영혼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생때같은 귀한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의 찢어지는 가슴을 치유하는 길도 될 것이다. 실미도 사건의 억울한 희생자들은 나라로부터 제대로 예우나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버렸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기막힌 심정을 어디에 하소연하랴!

어느덧 4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희생된 군인들의 부모 대부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실미도 사건의 베일 속에 가려진 의혹들을 낱낱이 밝혀 역사 앞에 있는 그대로 기록돼야 한다. 실미도 부대를 쭉 지켜보고 사건현장을 생생하게 접한 사람(증인)의 하나로서 하루 빨리 진상이 재조명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