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봉암은 20대 초반까지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를 다니며 독립운동사상을 다져 나갔다. 이 교회를 다니던 중 김이옥 여사를 만나 첫사랑의 인연을 맺었다. 교회 전시실에는 죽산이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청년회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전시돼 있다.
▲ 지난 27일 강화도 일원에서 진행된 '죽산 조봉암 선생 유적지 역사기행' 참가자들이 갑곳리 진해공원에 세워진 조봉암 추모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이민우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장이 강화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조봉암 선생 기념 명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학교 내에서는 죽산이 1911년까지 이 학교에 다녔다는 기록이 담긴 학적부가 발견됐다.
죽산 조봉암은 근·현대 정치사를 관통하는 걸출한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과 소련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 바람에 7년간의 투옥 기간 중 모진 고문을 겪으면서 손가락의 대부분을 잃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해방 정국에서는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며 토지개혁을 주도했다. 대통령 선거에 두 번 출마해 차점의 기록을 남겼고, 국회의원도 두 차례나 지냈다. 그의 삶은 짧은 지면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울 만큼 화려한 이력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는 북한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임을 당해야 했다. 뜻있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려고 저지른 '사법살인'이라고 입을 모았다.

진실은 201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사건을 재심한 대법원이 죽산에게 덧씌운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52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의 업적은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때 공산주의자였고,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친일의혹이 해명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죽산은 지금까지도 독립유공자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죽산의 58주기를 추모하는 행사가 지난달 31일 서울 망우리공원 묘역에서 열렸다. 빗줄기가 뿌리는 묘역 한쪽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화환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추모제에 참여한 많은 이들도 죽산의 명예회복을 한결같이 염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와 인천민주화운동센터는 지난 27일 강화도 일원에서 죽산의 발자취를 찾는 역사기행을 펼쳤다. 강화역사관 옆 죽산 추모비에서 첫걸음을 뗀 일행은 3·1 만세운동 장소와 그가 다니던 보통학교, 잠두교회로 발길을 이어갔다. 이민우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장의 해설을 통해 강화도와 인천에 새겨진 죽산의 행적을 짚어본다.

● 강화 시절과 3·1 만세운동

죽산은 1899년 9월25일 강화군 선원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생가는 금월리 '가지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친 조창규 씨의 묘소는 강화군 남산 공동묘지에 남아있다.

강화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다닌 죽산은 강화군청 보조원 등으로 근무했다. 이 때 잠두교회(강화중앙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청년회 활동을 벌이며 민족정신을 키워나갔다.

20대 초반의 열혈청년이었던 죽산은 이 곳에서 김이옥 여사를 만나 첫사랑을 꽃피웠다. 이후 이들은 상해에서 동거를 하는 동안 딸 조호정 씨를 낳아 길렀다. 구순의 고령인 조호정 여사는 지금까지도 죽산의 명예회복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1919년 3월에는 강화군 전역과 섬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만세사건이 터졌다. 여기에 참여한 그는 일경에 끌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 국내·외 독립운동과 투옥

형무소에서 출소한 뒤 서울에 거주하며 YMCA 중학부를 다녔다.

1920년 5월에는 대동단의 의친왕 탈출사건에 연루돼 한동안 일경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21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中央大學) 정경학과에 입학했다. 이 당시 '흑도회'라는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해 본격적인 공산주의자 활동을 벌여 나갔다.

1922년 러시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수료한 뒤 이듬해 9월 귀국해 박헌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

만주에서는 만주총국 책임비서를 지냈고 코민테른 극동군 조선위원으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1931년 상해에서 독립운동 단체인 반제동맹 한인지회를 결성한 이후부터는 공산주의자들과의 접촉을 줄여 나갔다. 하지만 1932년 상해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돼 7년 형을 선고받고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됐다. 이 곳에서 혹독한 고문과 동상으로 손가락 7개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 인천 귀향과 광복

1939년 만기 출소한 죽산은 인천 중구 도원동에서 1924년 결혼한 부인 김조이 여사와 살림을 꾸렸다. 당시 김조이 여사도 독립운동을 벌인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출소한 뒤였다.

도원동으로 옮기기 전 부평에서도 1년여 간 거주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곳에서 강화도 지인들의 도움으로 왕겨를 취급하는 인천비강조합장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가게 터는 현재의 신포시장 안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인천에 거주하는 기간 중에도 지하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해방 직전인 1945년 1월 일본 현병사령부의 예비검속에 걸려 또다시 투옥되고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죽산은 곧바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결성하고 노동조합과 실업자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그해 10월에는 인천시장에 해당하는 인천부윤 임명에도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실패했다.

● 공산당과 결별

1946년 죽산은 조선공산당을 장악하고 있던 박헌영에게 비판 서한을 보내고 결별을 선언했다.

일본에서 공산주의자 모임인 흑도회를 결성한 지 25년만의 일이다. 그러자 박헌영은 그해 6월 죽산을 공산당에서 제명하고 출당시켰다. 같은 달 죽산은 인천시민대회에서 좌익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죽산은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해 남북협상 대표로 북한 방문을 시도했다. 하지만 북한이 배신자로 낙인찍어 방북을 불허했다. 이런 점만으로도 죽산이 공산당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 토지개혁과 진보당 창당

죽산은 1948년 치러진 5·10 선거에서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지역구는 부평지역을 중심으로 계양, 서구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된 뒤에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했다. 지주가 독차지했던 농토를 경작자인 농민들에게 돌려주는 역사적 조치였다. 남한의 공산화를 막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차 당선된 뒤에는 국회부의장에 선출됐다. 죽산은 1952년 8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에 이어 2위를 차지했으나 이 결과가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죽산을 이승만의 도전자로 인식하기 시작한 자들은 그의 3대 국회의원 출마를 좌절시켰다.

1956년 1월 죽산은 진보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혁신정당 창당을 준비했다. 3·1 정신 계승과 민주적 평화통일, 책임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등이 주된 강령이었다. 그해 5월 3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도전해 무려 30%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러자 죽산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 진보당 해산과 죽산의 최후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죽산이 북한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공격했다.

1958년 1월에는 진보당에 대한 탄압에 들어가 당 간부들을 일제 검거했다. 죽산에게 마수가 뻗쳐오자 주위에서는 해외망명을 권유했으나 몸을 피하지 않았다. 2월에는 진보당 등록마저 취소되고 말았다. 간첩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죽산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했고 대법원도 마찬가지였다. 우파인사인 장택상과 윤치영 등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재심은 기각됐다.

결국 재심 기각 17시간 만인 1959년 7월 31일 죽산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권력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이 조국의 독립과 평화통일운동에 헌신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를 죽음으로 내 몬 것이다.

● 명예회복 운동

반공을 국시로 삼던 기나긴 시간동안 죽산의 명예회복은 꺼내기 조차 힘든 '금기어'였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된 1987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요구가 끈질기게 이어졌다.

2001년 7월6일에는 강화군 갑곳리 진해공원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조호정 여사는 2007년 죽산의 재심을 청구했다. 대법원은 마침내 2011년 1월20일 국가변란과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진보당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하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진보당의 평화통일론도 북한과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판결 이후 죽산의 생가터 발굴, 도원동 생가복원, 동상건립 등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죽산 탄생 120주년과 서거 60주년 기념행사도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

● 친일 의혹 주장과 독립유공자 인정 거부

그러나 그가 독립에 헌신한 공로는 여전히 인정되지 않고 있다. 보훈처가 일제 관치신문인 매일신보 기사를 친일증거로 제시하며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문에는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 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짧은 기사가 실려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서경정에 거주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헌금을 낼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는 증언도 만만치 않다. 이 보다는 죽산이 한 때 공산주의 운동을 한 것이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는 진짜 이유'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죽산의 진보당 해산 이후 50여 년만에 또다시 진보정당을 해산한 정권 아래에서는 더욱 그 기대가 난망했다.

● "죽산의 명예회복은 국가의 양심 회복"

최근 문재인 정부 들어 독립유공자 인정, 건국훈장 추서 움직임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지난달 31일 열린 죽산 추모제에서도 이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문 대통령은 물론 정세균 국회의장과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까지도 화환을 보내왔다. 인천지역에서는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일제히 추모행렬에 동참했다. 조봉암 평전을 펴낸 소설가 이원규 선생은 '죽산의 명예회복은 국가의 양심 회복'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이념적 편향 때문에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공로를 외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죽산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서둘러 훈장을 추서하는 것이 국격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촉구했다.

/글·사진 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