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통팔달 대규모 상권 형성
전국 최대공장 … 해방뒤 절정
닦는 불편·알루미늄에 밀려
1960년 이후 한동안 사양화
"인체 이롭다" … 최근 활성화
▲ 완성된 반상기.
▲ 구리와 주석을 용해하는 모습.
▲ 故 김수근 장인이 유기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유기는 놋쇠 또는 통쇠를 말하며 구리와 주석을 7대3으로 합금해 만든 놋그릇을 방자유기, 구리와 아연을 합금해 만든 그릇을 황동유기, 구리에 니켈을 합금 한 것을 백동유기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청동기 시대부터 유기를 제작했고 철기시대가 시작되면서 유기제작 기법이 쇠퇴했으나 18세기에 와서 다시 인기를 끌자 부호나 사대부들이 안성에 유기를 주문해 생산하게 했고 이로 인해 안성은 유기의 고장으로 불리게 된다. ▶관련기사 12면

◆안성유기업의 태동

예로부터 안성은 동서남북으로 발달된 교통로를 토대로 전국적인 상권이 형성되면서 안성장이 발달됐다. 또한 유기 장인을 비롯 수공업 장인들이 모여 수공업이 발달했다.

'안성은 경기와 호서, 해협의 사이에 있어 화물이 모여 쌓이고 공장과 장사치가 모여들어 한수 이남의 한 도회가 됐다'고 서술돼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적어도 17세기경에는 안성장을 중심으로 안성에 유장과 지장 등 수공업자들이 활발히 활동했고, 18세기경에는 도회를 형성할 정도로 발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조선후기 안성은 유기 선수장인(명장)이 많은 곳으로 지목됐고 안성의 유기 장인들은 국가의례에 빈번히 동원됐다.

1700년대 안성은 유기 명인이 많은 지역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안성 유기가 다른 지방 유기보다 유명한 이유는 조선시대에 한양 부호와 사대부의 그릇을 도맡아 우수한 품질과 아름답고 정교한 모양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를 '모춤'(마춤)이라 하여 '안성맞춤'이란 말이 생겨났고 꼭 맞는다는 말의 대명사가 됐다.

◆안성맞춤 유기의 명맥

일제 강점기에 안성에는 크고 작은 유기 제작 공장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큰 것이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였다.

해방이후 안성 유기가 갑자기 성행해 안성 시내 곳곳에서 유기업이 번성했는데, 주로 식기류인 반상기를 중심으로 수저, 젓가락, 담뱃대 등과 함께 농악 기구까지 만들었다. 농악기는 주로 방짜 기법으로 만드는데 이때부터 안성에도 주물 제작뿐 아니라 방짜 기법도 성행해 안성 유기의 절정을 이뤘다.

작고한 김근수(1916~2009)씨는 20세 때 유기회사에 입사해 당시의 장인인 김기준으로부터 유기 만드는 방법을 배웠으며, 한국전쟁 이후 '안성유기공업사'로 이름을 바꾸고 안성읍 봉산동에서 유기장인 10여명과 함께 유기를 생산해 안성 유기의 명맥을 이어왔다.

안성맞춤 유기의 전승자인 김근수씨는 사라져 가는 우리나라 유기의 전통을 근·현대에 걸쳐 계승해 온 장인으로 문화재청으로부터 주물 유기 제작 기술을 인정받아 1983년 6월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됐다.

김근수씨는 일제 강점기에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현대 들어 알루미늄과 스텐리스 그릇에 밀려 쇠퇴하던 유기 문화의 맥을 계승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한 평생 유기 산업에 매진하면서 후진을 양성했다.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의 각종 유기 문화재를 수집해 '안성마춤유기박물관'을 개관했다. 2005년에는 고령으로 명예보유자가 됐고, 현재는 김근수씨의 아들 김수영씨가 대를 이어 유기장 제77호가 됐다.

◆안성맞춤 유기의 제작 기법

조선시대 안성유기는 크게 두 가지 생산·판매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는 주문생산방식인 '맞춤'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대중적인 물품을 생산해 기성품으로 판매하는 방식이다. 맞춤 유기는 상류층이 미리 자신의 기호나 수요에 맞게 주문해 생산하는 방식이다.

조선시대 유기 제작방식은 크게 볼 때 주물유기제작법과 방짜유기제작법이 있다.

방짜유기 제작법은 쇳물을 녹여 '바둑'이라는 쇳덩어리를 만들고 이것을 두드려서 늘여가며 제작하는 것이며, 주물유기제작법은 녹인 쇳물을 완성할 기물의 틀에 부어 만드는 것이다.

주물유기제작법은 식기 등 작은 기물이나 향로 등 모양이 복잡한 것을 제작할 때 사용하는 기법이다. 방짜유기제작법은 숟가락, 대야 등 모양이 단순하고 크기가 큰 생활용품을 제작할 때 사용하는 기법이다.

일제 강점기 유기는 일본을 통해 수입되는 새로운 식기들에 의해 생산과 판매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 그 대표적인 것이 '왜사발'로 불리던 일본산 사기그릇이었다. 이 시기 유기제작으로 유명했던 평안북도 정주군 납청지역에서는 기계 망치인 일명 '함마'를 방짜유기제작에 도입했다.

이에 따라 이전에 11명이 1조를 이뤄 제작하던 것을 6명이 1조로 일하며, 생산성을 현저히 높여 불황을 타개해 나갔다. 이렇게 돼 전국적으로 방짜유기는 납청에서 생산과 판매에 있어 우위를 점하게 됐다. 이 시기 안성의 유기점들은 생산원가가 적게 드는 반면 생산량이 많은 주물유기제작으로 생산방식을 특화했다.

이후 유기는 연탄의 등장과 알루미늄 그릇의 사용, 그리고 닦기 힘들다는 이유로 1960년대 이후 한동안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지 않았으나 2010년 유기가 인체에 이롭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최근 유기식기가 활성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안성=오정석 기자 ahhimsa@incheonilbo.com /사진제공=안성맞춤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