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소작농이던 시절 … '가진 자'만 배부른 굴레
▲ 선두포는 선두2리의 부락 가운데 하나로 옛부터 농사를 짓던 마을이다. 부쩍 자란 벼들의 물결이 일렁이는 선두포 평야 위로 정족산과 그 산이 품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 선두1, 2, 3리는 농사가 주업이며, 선두 4,5리는 어업을 병행한다. 선두5리 어판장 한 켠에서 한 할머니가 좌판을 벌인 채 야채 등을 팔고 있다.
주민 소유 땅은 절반 … 곡식 못 내면 전부 잃기도

가구 수 늘어난 현재, 인구는 줄고 농·어업 병행



부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잘 자라는 아이처럼, 8월 중순의 벼는 어느새 60㎝~70㎝까지 자라 있었다. 벼에 송알송알 맺힌 빗방울이 벼를 더 선명한 초록색으로 보이게 해 주었다. 저 만큼 키우기 위해 선두포 주민들은 지난 6월부터 뙤약볕을 맞으며 비료를 주어야 했다.

올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린 것은 다행이었다. 수년 전 가뭄 으로 갈라진 논바닥처럼 애태우다 결국 한강물을 끌어다 써야 했던 때에 비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제 11월 추수 전까지는 눈으로만 키우면 될 일이다. 선두평야의 벼를 바라보는 농부의 구릿빛 얼굴에 물결같은 잔주름이 잡힌다.

코넬리어스 오스굿은 1947년 선두포의 모든 토지와 그 일대는 개인의 재산이며, 경제적 부가 주로 마을 앞에 뻗어 있는 논으로부터 나온다고 연구서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선두포엔 27채의 집에 169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7가구는 충분한 땅을 소유했고 11가구는 자신들 소유의 땅이 있었으나 충분치 않아 다른 땅을 빌려야 했다. 6가구는 빌린 땅에서만 경작을 했고, 3가구는 집터를 제외하고는 땅이 없었다. 선두포의 12가구는 언덕 위쪽 숲속에도 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했고 소나무의 작은 가지들만을 연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오스굿은 선두포의 57ac(에이커, 약 6만9691평) 정도의 땅이 선두포 주민들의 소유이거나 사용되고 있었으며 약 75%가 논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3만907평에 해당하는 땅이 부재지주로부터 임대한 땅이며 2만8973평의 땅이 토지소유주 자신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으며 부재지주들은 강화읍내와 인천에 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과거엔 임차료가 생산의 2분의 1 정도였으나 미국이 들어오고 나서는 3분의 1로 줄었다고 덧붙였다. 미국인들이 일본의 관리와 잔재를 제거하면서 곡식징세를 30%까지 낮추었기 때문이다.

추수 때가 찾아오면 땅주인의 대리인인 마름이 돌아다니며 타작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 땅 주인의 몫을 계산했다. 농부들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곡물을 명목상의 가격으로 납부하는 일이었다. 이때문에 일부는 최소한의 곡식을 지불하고 어려운 상황을 피해가기도 했으나 전부를 잃는 농부들도 있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은 배를 굶주렸고 영향력 있고 지식 있는 사람들은 덜 고통을 받았다. 오스굿의 연구를 종합할 때 당시 선두포의 많은 사람들이 소작농으로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을 맞았지만 여전히 많은 고통을 받았으며 '가진' 사람들만 살아갈만 했던 것이다.

여기서, 선두포의 지리적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두포는 동들머리, 무초네와 함께 선두2리에 속하는 부락 가운데 하나다. 오스굿은 처음 한국을 연구하기 위해 제주도, 경주, 강화도를 표본 후보지로 올렸다가 최종적으로 강화도를 선택했다. 그 중에서도 선두포가 핵심 표본이었다.

선두포는 선두2리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자연부락이다. 현재 길상면 행정구역 명칭인 선두리도 선두포에서 유래한 것이다. 1707년 선두언이 완공되기 전까지 선두포는 강화본도의 남쪽에 있는 가장 큰 포구였다. <길상지> 2호는 고려 항몽시기 삼별초가 주둔하던 정족산성의 서문 아래쪽에 위치한 해상관문이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선두포엔 지금 40여가구 80여명 정도가 살고 있다. 가구수가 70여년 전보다 많아졌음에도 인구가 줄어든 것은 60이상 노년층, 한 가구에 2명 정도만 사는 집이 많기 때문이다. 선두포에서 아이들이 있는 가정은 3가구 뿐이라고 심상점 선두2리 이장은 말했다. 선두포 주민들 가운데 50% 정도만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귀촌한 사람들이 40% 정도, 상업이 10% 정도이다.

비 내리는 선두포 평야에 서서 선두포를 바라본다. 정족산 앞으로 초가집을 개량한 가옥들과 귀촌인을 중심으로 새로 지은 펜션 등이 섞여 있는 마을풍경이 정겹게 다가온다. 이제 두 달 정도 지나면 선두포 평야는 금빛물결로 출렁일 것이다. 선두포 농민들의 얼굴에도 금빛 미소가 선두포 평야의 알곡들처럼 번질 것이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선두리마을 원로 이재선옹 "절에서 쌀 꿔다 못갚으면 땅 뺏겨 … 보리만 먹고 살았지"



"1947년이면 내가 일곱 살 때였던 같아. 그런데 미국사람이 큰 카메라를 들고 마을에 오가는 것을 본 기억이 나네. 나중엔 책도 만들더라구."

강화도 선두리 토박이면서 마을원로인 이재선(78. 선두2리 666번지) 옹은 "어렸을 때 카메라를 들고 마을을 누비는 외국사람이 신기해서 따라다니며 구경한 기억이 있다"며 "그로부터 몇 년 뒤 책을 가져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회상했다. 1947년 코넬리어스 오스굿이 선두포의 문화사를 연구했고 1951년 책을 출간한 것을 볼 때 그가 기억하는 외국인은 오스굿으로 추정된다.

"그 때 우리 마을엔 보통 한 집에 6~7식구가 살았고 대부분 농사를 지었어요. 어린 나도 소를 몰고 다니며 농사에 힘을 보탰지."

어려서 증조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와 8남매 등 그의 집안은 4대가 함께 살았다. 길상국민학교를 다니 그는 12살 때부터 학교가 끝나면 농사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늘 배가 고팠다. 무엇보다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쌀이 귀하다 보니 보리와 감자를 많이 먹었는데 그나마 보리조차 흔하지 않았어. 하루 2끼 꽁보리밥만 먹고 살았어."

이 옹이 어린시절 '장리쌀'이라는 것이 있었다. 쌀이 있는 곳에 보리를 꿔다먹고 가을 추수 때 쌀로 갚는 제도였다. 당시 그나마 곡식이 있었던 곳이 사찰이었다. 시주한 곡식이 있었던 것이다.

"절에서 쌀을 꿔다 먹었는데 쌀을 못 갚으면 땅으로 되갚아야 했수. 그래서 절땅이 참 많았지."

빚으로 청산한 땅을 되돌려 받은 것은 죽산 조봉암이 토지개혁을 하면서다. 이후 선두포의 생산량이 늘어난 때는 1974년 '동주농산'이 식량증대를 목적으로 바다를 막아 육지로 만들면서 부터이다. 여러가지로 많이 변했지만 선두리 사람들은 여전히 농촌의 전형적 마을공동체로 오늘을 살아가는 중이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