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윤 동구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 Percival Lawrence Lowell의 기행문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 (1886) .
1883년 제물포의 개항과 1899년 경인철도의 개통으로 제물포(인천)는 경부선이 개통되는 1904년 이전까지는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최단거리로 서울로 접근하는 통로였다. 당시 동아시아에 관심을 기울이던 서양의 여행가와 외교관, 선교사 등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여행을 하면서 조선의 중심 한양으로 가는 여정을 제물포항에서 시작하였다. 이곳을 거쳐서 간 이방인들은 자신의 시각으로 제물포에 대한 기억을 남겨 놓았다.

제물포에 대한 기억을 남긴 외국인들의 대표적인 기록은 이렇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샤를 루이 바라(Charles Louis Varat)의 <한국으로의 항해>(1888), 프랑스 외교관인 끌라르 보티에(Claire Vautier)와 이뽈리뜨 브랑탱(Hippolyte Frandin)의 <한국에서>(1905), 고종(高宗)의 사진을 처음으로 촬영하여 한국에 사진술을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퍼시벌 로런스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의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1886),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Landor)의 <코리아 또는 조선> 등이 있다.

이들이 남긴 제물포에 대한 첫 인상은 증기선을 타고 항구로 들어오면서 마주한 자연경관이었다. 이들은 작은 항구를 둘러싼 크고 작은 섬들과 아기자기한 해안선, 그리고 멀리 보이는 작은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작은 바닷가 마을의 경관 등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해 감탄한다.
그러나 여행자들이 이런 자연 풍광을 뒤로 하고 첫 발을 디딘 제물포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항구를 둘러싸고 있는 민둥산, 갯벌 때문에 삼판선으로 옮겨 타야만 상륙할 수 있는 정비되지 않은 항구라 할 수 없는 항구, 1m 정도 높이의 짚으로 엮은 지붕으로 된 누옥(陋屋)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선인 마을이 그들의 눈에는 생경하게 보였을 것이다. 또한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럽식의 하얀색 건축물들이 정비된 외국인 주거지와 정갈하게 정돈된 일본인 거주지, 나름대로 정비는 되어 있으나 청결하지 못한 중국인 거주지의 모습들을 기억으로 남기고 있다.

그리고 방파제를 쌓느라 바지를 걷어붙인 채 흙을 나르는 수많은 조선인 토목 인부들, 헐렁한 반바지 같은 옷과 하얀 무명 조끼를 걸친 짐꾼들이 투박한 나무지게로 짐을 나르는 조선인 부두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이 무렵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기록에 보이는 제물포에 대한 경험은 그들이 거쳐 간 항구와 인근의 거주지, 인천에서 서울로 향하는 경인가도의 정비되지 않은 풍경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에 의해 발간된 에는 근대건축물이 들어선 인천의 이국적 풍경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특히 1892년부터 1903년까지 인천지방 선교부 책임자로 파견되어 11년 간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였고 영화학교를 개설하기도 하였던 존스(Geo Heber Jones, 조원시)는 1897년 10월 호에 쓴 「제물포」에 당시 문학산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남겨 놓기도 하였다. "인천도호부 정면에 위치한 문학산 정상에 비류의 '미추홀' 성벽 유적들이 화관처럼 산등성이 주변에 흩어져 있고… 오래된 성문의 덮개가 여전히 서 있다. 내부의 높은 지점의 봉화대가 웅장하게 서 있다." 적어도 존스가 이 기록을 남길 당시 문학산성과 봉수대가 상당 부분 남아 있었고 그 모습은 항구나 몇 마일 떨어진 주변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당시 서양인의 눈에 비친 제물포의 풍경은 그들이 거쳐 왔던, 조금 더 일찍 개항된 동아시아의 도시와는 달랐다. 아직은 항만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도시 기반 시설이 정비되지 않은 채 이제 막 일어서려는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던 제물포의 경험을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인천은 '인천 최초'가 '한국 최초'가 되는 경험을 정말 많이 할 정도로 서양 문물 도입의 물결을 최전선에서 맞이하게 된다.